부활절 요한복음 11:17-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1.내가 얼마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무덤을 찾았다. 어머니 식구들은 한국 전쟁이 나기 전에 남한으로 탈출을 하셨는데, 어머니는 가족이 밤에 배를 빌려 타고 내려오는데 북한군이 머리 위로 총을 쏘았던 것을 이야기하곤 하셨다. 그렇게 북한은 참으로 아프고 어려운 기억이 있는 곳인데, 할아버지는 무덤을 휴전선과 아주 가까운 파주에 두셨다. 묻히신 곳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묘지이다. 2.이 지역을 둘러보니, 강화, 김포, 파주를 따라서 불과 2km밖에 되지 않는 한강을 따라서 강 건너편은 북한이고, 이쪽은 남한이다. 남쪽에는 높은 아파트들이 잔뜩 서 있다. 큰 삼촌도 나이가 들면서 일부러 북한이 가까운 곳에 집을 사셔서 노년을 보내고 계시다. 그래서 같이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을 찾았는데, 주변에 보니 비석에 적힌 구절들이 눈에 띄었다. 성경구절을 적은 비석도 있었고, 자신의 믿음을 유족들이 적은 비석도 있었다. 3.비석은 뭐랄까? 그 사람이 어떠한 신앙의 사람이었는지 정리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비석에는 이름을 적고서는 “주님 오시기 전까지 여기에 잠들다”라고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 무덤 바로 옆에는, 감리교 목회자로 지도자이셨던 분이 묻히셨는데, 아버지 이야기로는 온천을 하다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비석에는 오늘 본문의 말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가 적혀 있었다.
4.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이미 죽음으로 들어간 곳에서 나는 부활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군인들이 피를 흘리며 목숨을 바쳤던 자리에서, 그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만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결국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한 분들을 생각하며, 진정코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에 대해서도 묵상하였다. 5.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가지는 최고의 두려움은 죽음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이것을 피한지 못했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는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지만,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또한 자연의 질서인 것이다. 6.그리고 그렇게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 하루 더 사랑하고 오늘 하루 더 용서하고, 오늘 하루 더 하나님과 교통해야 한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방법이다. /더더군다나,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거리를 두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린 자나 숨겨진 자가 아니라 찾은 바 된 성도가 되어야 한다. 7.우리가 감격해서 부르는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 보면,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에 대한 영어 가사가 “I Once was lost, and now I am found”라고 되어 있다. 이사야 62:12을 보면,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사라졌던 사람들, 사라졌던 마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사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받지 않는 성읍이라 하리라”고 한다. 8.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의를 신뢰하고 그 앞에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게다가 부활의 메시지는 죽음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단절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우리를 다시 연결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다. 물론 부활에 대해서 이제 신앙생활의 연륜이 짧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9.“그렇다면 이 부활의 시기는 언제이고, 어떤 사람이 어떠한 기준에 의해서 선택되어지는 것인가? 왜 부활이 나타나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기본적으로 정말 부활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요새는 화장(cremation)을 많이 해서 사람의 유해가 가루가 되어 사방에 흩어졌는데, 이것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하는 염려가 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10.사실 부활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시간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시간을 인위적인 수고나 조작을 통해서 맞추려 하지만, 주님이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이신다는 것 자체가 무지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사후의 천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들려지는 부활의 메시지, 즉 지금 당장 부활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고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지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11.//오늘 본장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러분은 죽어가는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은 인간세상에서 겪는 것 중에 가장 큰 고통이요 충격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살아있는 배우자나 가족들에게 성질부리지 말고, 말 한마디를 해도 친절하게 하고, 귀찮아도 집안 일도 좀 도와주고, 상대방을 힘나게 하는 말을 하는 삶을 살아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12.아무튼 오빠의 위중함 속에 마리아와 마르다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이 빨리 오시기를 요청한다. 사실 이 남매는 평상시에도 주님을 섬겼던 사람들이었다. 주님도 이 남매를 사랑하셨다(5절). 그러니 이러한 특별한 관계 속에 빨리 예수님이 오셔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리신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당연히 그러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빨리 오지 않으셨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요청을 올린다. 13.그리고 그 시기는 솔직히 말해서 가능한 빨리(ASAP)이다. 일을 빨리 처리해주었는데 불만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일이 그렇게 빨리 쉽게 되면 쉽게 버릇이 나빠지는(spoiled)일도 나타난다.
전에 목회하던 곳에서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교회건물을 사게 되었다. 그러자 장로님 한 분이 “이렇게 빨리 사면 안되는데” 하는 것이었다. 14.물론 이분은 이 일을 위해서 적지 않은 부분을 감당하셨다. 그러나 그 분이 생각한 것은, 교인들이 더 고생을 하고, 더 애를 써야 하는데, 이렇게 일이 쉽게 되면 그 가치를 망각하고 훈련도 덜 받게 된다는 것으로 읽혔다. 실제로 모든 일들이 빨리빨리 쉽게 진행되는 것으로 보이자, 사람들이 더 감사하고 겸손해진 것이 아니라 요구사항은 더 커져갔고, 한국의 대형교회와 비교하면서 본인들의 주장을 하게 되었고, 정작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더 쉽게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15./주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우리의 역량이나 영성의 힘도 성장해야 하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당장 자기 앞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인내와 믿음을 보이기 보다는 상대방을 닦달하기 쉬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나사로가 죽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고서 나흘이 지나서야 그들의 집이 있던 “베다니”로 오셨다. 자매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요구한 타이밍이 있는데 예수님이 이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16.그러니 이제는 그들의 마음 속에 섭섭함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거절되면 기분 상한다. 심지어 신앙생활 속에서도 주님이 내가 원하는 시간과 방법으로 도와주시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면서,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나 회의가 드는 경우가 있다. 아마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신앙의 큰 인물들은 없을 것이다. 17.그래서 예수님을 맞이한 마르다는 먼저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 본문 21절에 보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여기에 없었기 때문에 오빠가 죽은 것이라고 예수님 탓을 하는 것이다. 우리도 어떠한 목표나 지침을 정하고 기도하면서 기대하였지만, 이미 실망스러운 일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마르다의 마음이 딱 그랬다. 18.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신뢰하였던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원망을 계속 할 수는 없었고, 믿음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섭섭하지만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할 것을 말한다. 아마도 마르다는 이미 죽은 오빠가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혀 뜻밖의 말을 하신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니라(23).” 그래서 마르다는 이것은 마지막 날에 성도가 살아난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멀리 있거나 당장 잡히지 않는 말씀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을 지칭하셨다. 19.예수님은 심지어 25-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죽음의 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상심한 마르다에게 자신이 바로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신다. 즉,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을 주는 부활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비겁해지고 나약해지고 심지어는 정신적인 어려움까지 가지고 사는지 모른다. 20.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생명과 부활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이러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너무 용감하고 너무 잘 싸우고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내가 함께 하는 분이 강하시고 죽음을 넘어서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도리어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반드시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이 있다. 21.마치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 땅 앞에 선 이스라엘 사람과 같이, 용기를 내어 전진해야 할 순간이 있다. 이때 우는 소리와 원망만 하던 사람들은 광야에서 사라졌고, 도리어 용기를 내어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장수하였고, 오늘날도 그들의 용기, 노년에 이르러까지 본이 되었던 담대함은 성도의 진정한 표상이 되었다.
본문으로 돌아와, 이미 나사로의 시신에서는 냄새가 났다. 22.사람의 의지를 꺾는 중요한 감각이 시각인데, 시각보다 더 마음을 휘어잡은 것이 바로 후각이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에게 섭섭함을 품고 있는 자매를 앞에 두셨고, 남 말하기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렇게 전반적인 분위기가 비관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막은 돌을 옮기라고 하신다. 23.무덤 입구를 막은 돌을 굴리려면 도구도 있어야 하고, 성인 남성 여럿이 붙어서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마르다가 시체 냄새가 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늦게 와서 성가시게 또 무슨 일을 하시냐는 불편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하였느냐”고 하신다. 24.누가 영광을 보는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믿음을 잃지 않는 자가 영광을 보는 것이다. 물론,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당연히 중간에 낙심할 일도 생기고 내가 이렇게 믿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도 다 중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애굽으로도 갔고, “하갈”을 들여서 아들을 낳기도 하였다. 그런데 중간에 흔들림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중심을 하나님 앞에서 잃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25.인생에는 우리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부정적인 소식과 낙담되는 모습들이 있지만, 이렇게 보이는 것에 의지해서 살기 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하심과 구속의 은총을 믿을 때, 우리는 바로 믿음 위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에 따라 받게 된다(10)고 하는데, 그렇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서는 것임을 알려준다. 26.그러면서 따르는 말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7)” 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에만 휘둘리는 상태에 있다면 죽음은 너무나도 두렵고 강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9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듯이,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가 될 때, 이 사람은 그것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손해 본 것 같고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27.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무덤에 누이셨다,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런데 죽음마저 넘어서게 하는 이러한 부활의 예시가 예수님으로만 끝났다면, 사람들은 “그것은 예수님이니까 그랬지” 하면서 부활의 용기와 능력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떠한 지도자나 대단한 사람이 일을 잘했다 못했다, 어려움을 뚫고 갔다 못 갔다 하면서 평가만 하기 좋아한다. 자신도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면서 이겨내기 보다는 그냥 다른 대상을 평가만 하는 것이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28.그런데 예수님이 아니라 나사로가 부활하였다. 죽은 줄 알았고, 아니 진짜로 죽었던 나사로, 몸이 썩은 냄새까지 나던 나사로가 부활하였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하여 성도들이 부활을 믿는 믿음 가운데, 세상 속에서 더 담대하고 소망 있는 인생을 살도록 하셨다. 부활은 예수님만의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주님의 능력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29.다만 우리가 부활했어도 그 인생이 부끄러움과 어두움뿐이라면, 부활이 기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믿는 가운데 더욱더 담대하고 헌신적인 신앙생활을 통하여 부활이 기쁜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의 일을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나사로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30.자기가 실제 죽음을 통과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서 바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게 하시는 부활의 주님임을 드러낸 것이다. 요한복음 12:11을 보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고 한다. 결국 가장 섭섭한 상황을 겪었을 사람이 가장 큰 은혜와 능력의 증인이 되었다. 우리가 부활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용기와 소망을 주기 때문이다. 31.한번 사는 인생, 섭섭함과 원망과 분노에 삼킴을 당한 것이 아니라, 소망 있는 인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오늘 하루를 살더라도 힘있게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말씀 하신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이 되시고 생명이 되신다. 32.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 부활의 능력을 신뢰하는 가운데, 영원히 주님과 거하는 복된 인생을 살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소망 없이 사라져 가는 인생의 소유자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 소망 있는 삶을 살고, 그 가운데 일상의 시험을 넘어서고 승리를 나타내는 좋은 본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