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33-43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박성일 목사)
1.얼마 전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한국말이 들렸다. 흥분한 한국 여자분이 교회에서 자기가 겪은 화난 일에 대해서 상대편에게 했던 말을 또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게 앉았기에,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입맛이 딱 떨어졌다. 이런 일은 LA에 가서 한식당에서 밥 먹을 때에도 종종 발생한다. 2.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밥먹는데 가서는 교회 일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뭔가 은혜롭고 좋은 말을 하기 보다는, 다 자기 화난 일이나 원망하는 말을 쏟아내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런 소리를 만약에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분명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뭐 저러냐? 나는 절대로 교회에 안 갈꺼야” 라고 생각할 것이다. 3.그러니 생각없이 뱉은 말들이 전도를 막고 교회의 이미지를 훼손한다. 어쩌면 교계신문에 실리는 복잡한 뉴스나 스캔들보다 이렇게 평상시에 부정적이고 듣기 민망한 말을 하고 다니는 행태가 더욱더 가까운 거리에서의 방해거리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런 소리를 내기 전까지 분명히 속상하고 화가나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4.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로서, 그런 일들을 신앙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속상한 일들이 다 피해가는 것도 아니고, 속상한 일은 속상한 일이다.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이러한 불덩이를 쏟아내고 싶다.
5.나도 군생활을 하면서 부당한 일을 많이 경험하였다. 특히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더욱더 피해를 많이 보았다.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나중에 제대를 하면 동기들을 만나서 나의 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들을 밤새도록 쏟아 내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대가 가까워지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나의 이러한 이야기를 누구도 듣기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6.나에게는 이 일이 무척 중대하고 치명적인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그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을 이미 20살에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살다 보면, 상대하고 난 다음에 힘이 솟고 잘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 안에 있던 힘마저 다 빼앗아 버린다. 사람들이 누구에게 가고 싶어하겠는가? 여기에 대해서 “아니 내가 부당한 일을 많이 당했다니까요? 내 인생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열권도 더 나올 것입니다.”하는 사람이 이민 사회에 몇 십만명은 있을 것이다. 7.그러나 그것을 아는가? 아무도 그 책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고생하고 초라해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그냥 나에게만 중요하게 남겨졌을 뿐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덕이 되는 이야기는, 자기 마음에 시험이 왔지만, 기도하고 주님을 붙들면서 마침내 이겼다는 것들이다. 8.그러나 분명히 이러한 수준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간도 걸리고 연단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오해를 당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나는 나름대로 바르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오해를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자기 추측을 섞어서 말한 일이 있을 것이다.
9.놀랍게도 남들이 자기에 대해서 잘못된 말을 한다고 분노하는 사람이, 돌아서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자기도 근거 없이 멋대로 말을 보탠다. 자기 감정이나 유익을 위해서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자극적인 한 부분만 전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없던 말을 갖다가 붙이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러한 태도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0.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22) 끝부분을 보면, 예수님께 들은 예언에 더하는 사람도, 혹은 제하는 사람도 거기에 상응한 대가를 치를 것을 말하고 있다.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그렇게 오래 다니고서도 자기에게 닥치는 시험의 시간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11.그래서 지금까지 기껏 수고한 것들을 다 무위로 만들어 버리고, 덕을 끼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근심거리로 전락 할 수도 있다. 훌륭한 성도는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성도가 아니라, 시험의 시간을 신앙적으로 이겨내고 승리를 보여 주는 사람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무나도 무거운 시험의 시간을 적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시게 되었는데, 식사 전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적대자들에게 찾아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26:15)고 묻는다. 12.그리고 다음절을 보니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한다. 이러한 유다의 상태에 대해서 누가복음 22:3을 보면,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니 유다는 큰 시험에 든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상하는 일을 당할 때, 시험에 들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상태가 아니라, 사탄이 그 마음을 빼앗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13.유다 또한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이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뭔가 자신의 요구치와 예수님이 하신 것이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 때문에 이미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14.“세상에, 떡을 많게 만드실 수 있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계속 떡을 공급받는 것인데, 우리의 요구치와는 달리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다니!” 이렇게 자신들의 요구와 이해에 벗어나는 일이 발생하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돌아섰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앙이란 것은 내 요구대로 주님이 하셔야만 맞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15.당연하게도 순종은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인간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이요, 그래서 순종은 능력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잡히시기 전의 마지막 식사 때,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나도 어려우셨고, 본문 21절을 보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다. 16.그랬더니, 제자들이 놀라고 걱정이 되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팔기로 약속하고 값까지 정하고 온 유다 또한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유다가 자신을 판 사람임을 알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유다는 이날 밤에 예수님을 잡으러 올 사람들을 데리러 나간다. /17.사람이 시험에 들 때,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탄은 우리에게 정당화 시켜주는 말, 나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말을 하고 누구보다 달콤하게 나의 일탈을 지지해 준다. 내가 지금 화가 났는데, 성경은 용서라하고 하고, 인내하라고 한다. 이러니 기분 나쁘지 않겠는가? 18.그러나 사탄은 사방에 떠들고 다니면서 너의 분노를 쏟아내라고 한다. 그러니 무척이나 좋아 보이지 않겠는가? 사탄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제일 공감해주고 제일 위해 주는 것 같이 행동한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방해거리가 되는 성경말씀을 묻어 버리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든다.
19.어떤 그림을 보니 자살충동을 느끼는 청년들을 찾아 다니는 말끔한 소년이 있다. 그는 상대방의 분통터지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는, 공감해 주고, 서서히 자살하도록 충동한다. 자기 또한 네가 죽으면 따라 죽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상대가 죽으면 따라 죽지 않고, 또 다른 타겟을 찾아서 똑 같은 짓을 한다. 20.사탄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는 우리의 눈을 가리고 달콤한 말로 속삭이다, 이제 자기가 속인 사람이 돌이키기 어려운 큰 죄를 짓게 되면, 그 때서야 가린 눈에서 손을 뗀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은 죄책감을 가지고 자신이 한 일을 보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유다도 결국은 목을 매어 자살해 버렸다. 21.그러나 그의 죄는 그의 죽음으로 씻어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가장 악한 인간으로 회자된다. 사실, 유다가 너무나도 못되어먹은 인간이 아니라, 자신 안에 들어온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약함이 그를 결국 악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폭풍이 칠 때, 가장 먼저 내게 다가오는 존재가 사탄이다. 22.나의 마음의 평화가 깨질 때, 사탄이 들어올 틈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4:25-26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말라”고 한다. 사람이 기분 나쁜 말을 듣거나 대우를 받으면 화가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 때문에 발끈해서 죄를 지어서는 안되며, 이것을 빨리 씻어내야 한다. 죄는 빨리 씻어내지 않으면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그래서 나의 영성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이렇게 틈이 생기기 때문에 마귀가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23.//한편, 이 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자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라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 또한 그렇게 말하는데, 베드로의 이러한 대답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로니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34)는 것이었다.
24.나는 16살에 처음으로 성경을 통독했는데,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다고 큰 소리치던 베드로가 여자 종에게 몰려서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고, 그러한 약함 때문에 심히 통곡했다는 장면을 읽고서는 처음으로 마음이 울컥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진짜 실력을 알지 못한 채, 자기가 꽤 잘하거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25.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의 말을 한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에는 자기는 우월하기 때문이다. 성도의 실력은 평화로운 때에 내가 어디 특별한 집회나 프로그램, 선교지에 가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작은 시험만 와도 심하게 흔들리면서 할말, 못할 말 다하는 사람을 향해서 존경심이 생겨 나겠는가? 예수님도 이 날 밤에 마음이 어려우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에 이르신 다음에, 그 중에서도 신뢰할만한 세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자신을 위해 중보기도할 것을 요청하신다. 26.38절에 보니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간절하게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살고 싶으셨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 날 밤부터 예수님이 겪은 고통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가시에만 찔려도 아파서 난리를 치기 마련인데, 못을 손과 발에 박고서는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로 달려서 극한의 고통과 목마름 속에서 괴로워하시지 않으셨는가? 27.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이 옴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국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신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같이 기도하러 간 제자들, 좀 전에 예수님이 자기를 팔 자가 있다고도 하시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아주 심각한 말씀을 하신 이 밤에도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었다. 유다가 섭섭함과 분노의 시험에 빠졌다면, 이들은 무지함과 태만의 시험에 빠졌던 것이다. 28.심지어 이들은 이런 무거운 밤에 누가 더 큰지 논쟁을 하기까지 하였다. 얼마 전에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했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을 타고 뭔가 한자리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이들의 눈을 가렸고, 그래서 정작 예수님에게 도움이 필요한 시간에 이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도망까지 가버렸다. 이들은 자신들을 예수님이 계속 깨우셨음에도 계속해서 자고만 있었다. 29.물론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그러나 이들은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아둔함과 분별력이 없는 부족한 제자들에게 41절에 보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 자신에게 시험이 올 때, 벌써 시험이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지혜가 있다. 현대전에서는 먼저 보는 쪽이 승리한다. 그래서 엄청난 돈을 들여서 인공위성 뿐만 아니라 정찰기를 운용하고 레이다를 돌리는 것이다. 30.자기에게 시험 드는 일이 있을 때, 자기를 자극한 상대만 눈에 보이고 그것을 뒤에서 조종하고 농락하려는 대상을 보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아둔한 상태에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는데, 어린 고양이일 때, 하는 놀이가 있다. 그것은 레이저 불빛을 바닥에 쏘는 것이다. 그러면 고양이는 레이저 불빛만 쫓아 다니면서 그것을 잡으려고 한다. 31.실제 레이저를 조종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고양이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는 것이다. 어쩌면 그 아둔함이 재미있어서 이런 놀이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쫓아가며 공격하려는 사람 또한 주님이 피를 흘리고 사신 주님의 백성이다. 뒤에서 조종하는 것은 마귀이다. 물론 그 사람이 나에게 실례가 되거나 말실수를 했을 수 있다. 32.그러나 나는 남들에게 그러한 말을 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았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보면 할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 일 것이다. 물론 진짜 억울하거나 오해를 받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역량은 기도하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잠언 24:10을 보면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고 한다. 어렵고 화가나는 현실에서 낙담하기 쉬운 것이 우리의 본성이지만, 이러한 낙담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갔는지 모른다. 33.유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연약하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교회 오래 다녔어도 덕이 되지 못한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기 바란다. 자신의 각성도 중요하고 예수님도 성령님도 이러한 우리를 도우신다. 34.예수님은 누가복음 22:31-32에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까부르듯이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다. 로마서 8:26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한다. 35. /시험에 들고 추하게 떨어지는 성도가 되지 않으려면 깨어서 기도하고 그 승리를 통하여 자신감과 평화를 드러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의 시작이요 주님께 영광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승리가 삶 속에 계속 나타나기를 축복한다.
36.바라옵기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기도하고, 시험이 와도 주님을 붙들고 이겨내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의 자랑스러운 군사로 서는 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