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6:9-18 “말씀을 제대로 듣는 자가 되라”
(2024.4.21 박성일 목사)
1.화가와 목사와 양치기가 처음으로 “그랜드 캐년(Grand canyon)”에 갔다. 웅장한 자연 앞에서 화가는 압도되었다. 그래서 화가는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시다”라고 외쳤다. 목사는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양치기는 “양 잃어버리면 못 찾겠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2.똑 같은 것을 보았지만 감격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딱 자기 수준에 맞는 말만 한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성도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거보다는 자신의 수준을 올리는 도전을 감당해 내야 한다. 10년 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자기의 믿음이 성장하지도 않았고 신앙인격도 그대로라면 그 부분부터 회개해야 한다. 3.10년 전에 어떤 말씀을 듣고 “아멘”은 하였지만 그것을 삶 속에 실행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이것 저것 좋다는 설교자를 찾아서 듣기는 하지만,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 부분부터 돌이켜야 한다.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는 성실성과 유능함을 요구받는다. 오늘 날에는 설교만 잘해서도 안되고, 성품 또한 좋아야 한다고 한다. 이것들은 타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오래전에 어느 목사님이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그 날의 설교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4.그러자 사모님이 이불과 솥을 들고 와서 주장하기를 “당신은 강대상에서는 천사이니, 이제부터 강대상에서 삽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도 감당해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권위가 실릴 수 없다. 나는 평신도 중에서 말이나 기도는 그럴듯하게 하고, 실제로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곤 했다. 5.어떤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밖에 나가면 그렇지 않다고 비난했다는데, 그 사람은 잘못 알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천사같기는 커녕 시기심에 눈이 멀어서 추악하고 은혜롭지 못한 말을 하고, 그렇게 당을 짓기도 한다. 인간은 죄인이다. 교인도 죄인이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성도 하고 새로운 결심도 해서, 어제 보다는 나은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6.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은 당연히 능력을 받고 자신의 언행을 점검해야 하겠지만, 듣는 사람 또한 말씀을 제대로 듣기 위한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자기가 유튜브로 유명한 강사나 목사님들 설교를 자주 보는 것이 자신의 귀가 높아지고 실력이 커졌다고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누가 누가 설교를 잘하나”가 포커스가 아니라, 나는 주어진 말씀을 실행하면서 성숙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고,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하는 사람을 우리는 감히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7.나는 교회 내에서도 사람이 자기 의를 내세우고 교만해지는 것에는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이 아무 상관없음을 보곤 했다, “저 사람이 교회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런 말을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미숙할 때는 자기가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교하고 심판하고 싶어한다. 물론 자기 자신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돌이켜 볼 만한 자각이 있다면 계속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심판의 주권은 온전히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 8.이것이 신앙인의 겸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우리는 말씀을 우리의 평가받을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주관할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하고 이것을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성품도 변화되고 신앙도 성숙할 수 있다. 9.//전에 수련회에서 한 청년이 물었다. 이렇게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아도 실제로 자신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는다는 하며, 그래서 어떻게 해야 자신의 신앙이 발전할 수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말씀을 듣고 신앙이 발전하는 것에는 3단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첫번째는 들은 말씀의 신실성을 믿는 것이다. 당연히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집중하고 전심을 다해 말씀을 들어야 한다. 10.두번째는 들은 말씀을 자기 삶의 기준과 진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말씀을 세상의 수많은 정보와 흐름과 같은 것 중의 하나로 놓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끌고 갈 주체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자신이 인정할 말씀을 기반으로 실행을 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귀로 들은 말씀을 손과 발을 움직여서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야, 그 말씀이 나의 살이 된다. 결국 듣는 사람도, 듣는 역량을 키워야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11.특히 자기의 마음이 불평한 감정이나 시기심이나 패배감이나 무력감에 잡혀 있다면, 이러한 것들이 온전히 말씀이 내 안에 뿌리내리는 것을 방해한다. 즉, 내 마음에 돌덩이가 너무 많아서 떨어진 씨앗들이 자라날 공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좋은 상태와 기분으로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특히 주일 예배에 올 때에는 이 부분에 대한 신경도 써야 한다.
예를 들어서 주일에 교회에 가려는데 아내가 성질을 긁었다. 한판 크게 싸우고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 12.그러나 결국 아침부터 싸우고 나면 교회도 가기 싫고,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그 마음이 편하지 않다. 교회에 오기 전에는 할 수 있으면 화가 나는 것도 참고, 하고 싶은 말도 다음으로 넘기는 것이 좋다. /나는 빡빡하게 부목사 생활을 했는데, 대부분 다른 부목사의 잘못으로 인해서 담임목사님에게 같이 혼나는 경우가 많았다. 경우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생활이었다. 그러니 담임목사님한테 불편한 생각이 들 수도 있었으나, 설교 시간에 설교자로 대할 때는 나의 불편한 감정으로 듣지 않았다. 13.이렇게 감정이 상한 일이 있었던 것은 있었던 것이고, 설교시간에 제대로 듣는 것은 나에게 유익이니,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목회를 하면서 무리한 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인상을 쓰거나 바닥을 보는 교인들을 보았다. 한번은 2년간 준비해서 한국에서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했다. 14.그리고 한 주가 지나서, 이제 온지 얼마 안된 여자 집사님이 자기가 아는 여자 목사님이 자기 집에서 머무르니 부흥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담임목사로서 강단에 서는 사람을 점검해야 하는 것이고, 이제 바로 부흥회 끝났는데, 또 바로 하자는 의견을 집사람을 통해서 의견을 전달받았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거절했다. 15.나중에, 그 집사님이 부흥회 강사로 세우자고 하던 분은 그 과거도 상당히 본이 안될 뿐더러 이단으로 판명 받았다. 아무튼, 그 여자 집사님이 주일 예배시간에 앉아있기는 한데 얼굴은 다른 데를 보고 있던 것이 생각난다. 살다 보면,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기분이 상하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은 전달자일 뿐, 말씀이 전달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16.//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예레미야의 시대는 타락으로 인해 나라가 망해가고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인 타락과 변질이 망국의 가속 페달을 밟았다. 종교적으로도 타락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 도덕적으로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제약 받지 않았다. 아니, 남들도 그렇게 사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는 악한 흐름이 흘렀던 것이다.17. 사람이 죄에 빠지면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정말로 나를 살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는다.
본문 7절을 보면 사람들은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악을 드러내고 폭력과 탈취가 성행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빈번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성실하게 듣는 자를 사랑하시고, 이러란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읽혀진다. 그래서 본문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 백성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고 하신다. 18.그렇지 않으면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떠나시게 되고 결국 무서운 징계로 들어가게 됨을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세상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다. 그러므로 죄 된 것에 대한 징계는 있을 수밖에 업다. 죄에 빠져 살아도 아무런 징계도 없고, 영생도 아무나 다 같이 누린다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9. /당시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백성들이 각성하기를 바랐으나, 그들의 반응이 어떠 했는지는 10절을 통해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20.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 보면, 어떤 말씀은 참으로 달콤하고 위로가 된다. 그런데 나의 약하고 악한 부분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면 이것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그러던 성도도 성숙하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의 애정 어린 지도임을 인정하면서, 말씀을 즐거움으로 받게 된다. 똑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 감정에 거스르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신뢰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1.한번 신앙생활을 하고 가야 하는데 끝까지 자기 불편한 주장만 하면서 교회에 덕도 안되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지도 못하는 인생이 아니라, 복된 사람으로서 누구라도 가까이하고 싶은 사랑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다 사람들은 이렇게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기에, 여기에 대한 징벌이 따라오게 된다. 이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는 것이다. 22.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요 우리의 왕이 되기 원하신다. 당연히 우리의 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살길이고 지혜이고 영광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거리를 벌리는 것이 바로 죄의 속성이요, 이 죄 또한 우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창세기 4장 2-5절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마음 속에 분이 가득 찼다. 이것이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다. 23.이렇게 분노하고 얼굴색이 변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지적하시며 7절에 보니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죄의 법이 내 안에서 싸운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요, 당연하게 하나님의 영역이 내 안에서 넓혀질 때,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나를 언제나 노리고 덤벼들려는 죄에 대해서는 권위를 가지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추한 꼴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24.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충만하게 임재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귀가 열려야 한다. 또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듣는 것과 통달한 상태로 듣는 것에는 그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지적인 수준을 올리고 영적으로는 겸허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로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이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구원의 길을 단단하게 한다. 25./물론 우리가 항상 은혜로운 것만 생각하고 죄를 멀리하고 깨끗하게만 살면 좋겠지만, 죄의 오염에 더러워지기도 하고, 시기심이나 원망의 때가 묻기도 하고, 혹은 의심의 녹이 쌓이기도 한다. /누구라도 “탱크”를 알 것이다. 탱크는 기본적으로 무한궤도(caterpillar)를 장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험한 곳이라고 돌파할 수 있다. 최신형 탱크는 4m 깊이의 강도 통과하고 경사가 심한 언덕도 올라가고 진흙길이나 눈길도 달린다. 26.원래 참호를 통과하는 용도로 만들어졌기에 사이가 벌어진 지면에서도 잘 달린다. 그런데 무한궤도를 쇠로 만들기 때문에, 5000km정도 달리면 공장에 보내서 아예 궤도를 다 분해한다. 여기에서 닳아빠진 부분을 교체하고 새롭게 해서 탱크에 장착한다. 그래야 다시 험지를 달리며 전투할 수 있는 것이다. 27.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영적인 싸움을 싸우다 상하고 닳아빠지고 약해지고 부서진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성도의 회복은 원망을 쏟아내고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고 회개할 때, 그 죄의 때가 씻어지면서 얻어진다. 그래서 그렇게 새로워진 심령의 궤도를 달고 다시 우리의 영적인 전쟁터로 돌아가서 잘 싸을 수 있는 것이다. 28.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자기 생각대로만 가고 있으면 언젠가는 궤도가 빠져 나와서 아무 쓸모가 없어진 탱크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 탱크는 버려진 채로 녹슬어 버리고, 그렇게 잊혀진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부끄러운 짓을 해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죄가 괜찮다고 하기
때문이다. 15절에 보면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고 한다.
29.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죄에게 마음을 빼앗기니 선지자나 제사장들도 시류에 맞추어 타락하게 되고, 많은 사람이 핍박과 착취를 당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정당화를 한다. 하나님은 16절에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고 하신다. 그 길이 심령의 평강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우리는 그리도 가지 않겠다고 한다. 30.17절에 보면 하나님이 백성들 위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 말씀듣기를 아예 거부하고 타락한 채로만 살겠다는 사람들의 결과는 어떠 했겠는가? /오하이오 주에 “클리블랜드”라는 도시가 있다. 이 이름은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서 따왔는데, 젊었을 때, 친구들과 술 마시기를 좋아하던 클리블랜드는 어느 날 친구와 술집에 가다 교회를 지나가게 되었고, 거기에 적힌 그날 설교제목이 그의 마음을 잡았다. 31.결국 그는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신앙적인 결단을 하였고, 같이 가던 친구는 죄수가 되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이후에 대통령에 이른 클리블랜드의 소식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같은 것을 보았는데, 한 사람만 말씀에 끌렸던 것이다. /32.성도는 같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영적인 수준을 올리고 겸손해져서 말씀 속에 있는 진정한 보화를 캐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19살 때, 베이스 기타를 사서 혼자 연습했다. 이미 피아노와 기타를 오래 쳤기 때문에 금방 익힐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베이스 기타를 익히고 나니 기존에 들었던 노래의 베이스 연주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의 귀가 그쪽으로 열리니 안 들리던 것이 들리게 된 것이다. 33.내가 오늘 들은 말씀 중에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강력하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는데, 내가 무지하고 둔해져서 그것을 놓쳤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과 겸손으로 듣는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실제로 수많은 충동과 유혹 속에서도 그렇게 듣도록 현장에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바란다.34. 그 가운데 가려졌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아 천국길로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는 가운데 우리의 힘이요 의지요 생명의 공급이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살고, 즐거움을 얻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는 성도,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의 중심에 있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즐거움과 기쁨이 되는 인생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