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12-22“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는 사람들”
2024.4.28 주일설교(박성일 목사)
1.내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 많은 학생들이 출석을 했는데, 옆에 있던 공대에 다니는 한 2세 여자 학생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 뉴욕 한인사회에서 커다란 사건이 하나 터졌다. 플러싱(Flushing, NY)에서 어떤 장로님이 LED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온 중년의 남성이 따로 정해진 직업도 없고 해서 안되 보였기에 교회도 소개시켜 주고, 자기 사업체에서 일을 가르쳐주었다. 2.그런데 이 사람이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 나이도 있으니 자기 고집도 대단했다. 아무튼, 장로님은 그 사람을 몇 년 곁에 두었고, 그 사람이 독립을 해서 자기 가게를 열었는데, 역시 같은 LED 업계에 일을 하였다는 것이고, 두 사람이 사업관계도 이어 나갔다. 나이가 들어서 사업을 하였으니 쉽지는 않았고 이런저런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3.그리고 그 분노는 자기를 받아 주고 일을 가르쳐준 그 장로님에게 향했다. 그래서 권총을 들고 그 장로님의 가게로 찾아갔는데, 마침 그 장로님은 없고, 아까 이야기한 여자 학생의 오빠가 있었다. 나이가 불과 20대 중반이었던 청년이었다. 거기에 가서, 이 사람은 청년의 머리에 총을 쏴서 살해하고 도망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라지고 오랫동안 수색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4.이상하지 않은가? 정작 어려울 때, 자기에게 일자리를 주고 사람들을 연결해준 사람에게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은혜를 갚기는 커녕, 선한 의도로 자기에게 그나마 관심을 가져준 사람에게 엉뚱한 마음을 품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인성이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5.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죄에 빠지게 되면, 놀랍게도 자신의 망가진 인생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분노를 쏟을 대상을 찾으려고 한다. 남에게 분노의 이유를 찾는 사람은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이다. /반대로 나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을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심지가 곧고 스스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작은 지적이나 자극에도 크게 충동 받지 않고 스스로를 돌이켜 보며 점검한다. 6.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작은 지적이나 자극만 받아도 세상을 다 뒤엎을 것처럼 난리를 친다. 이러할 때, 이 사람에게 교회로부터 받은 직분이 있다면 사실 더 민망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직분은 계급장이 아니고 남에게 있어 보이려고 주는 것도 아니다. “집사”의 원래 뜻은 먼지를 날리며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장로에 대해서도 그 가정이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7.“권사(exhorter)는 여자들이 많이 헌신하던 “조선”의 상황에서, 당시의 정서로는 여자에게 장로를 주기는 어렵고 해서 생겨났다가, 이제는 성별의 구분없이 수여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28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감리교는 안수를 받는 과정도 어렵고, 받고 나서도 오랜 시간 관리체계 속에 묶여 있게 된다. 8.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목회자를 필터링(filter)하는 시간을 두는 것이 평신도들을 위해서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한편으로는 그것을 원했으나, 한편으로는 그것의 무게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만약에 교회에서 직분을 받게 된다면, 그것의 무게를 알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직분을 믿음의 크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에 부족했던 사람들이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고무되기도 한다. 9./나는 교회를 찾은 이들 중에, 교회에 한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곤 했다. 여름 성경학교라도 한번 따라가고, 친구 따라 교회가본 일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신앙에 대해서 배우고, 세례를 받고 자기의 나아갈 길과 의지할 이를 찾았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다. 10.그러나 어떤 학생들의 경우에는 공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주변에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신앙생활이 도태 될까 봐 두려워하였다. 그만큼 주변의 환경과 과거의 삶을 통해 압박을 받는 현실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토대가 단단하지 않은 사람은 더 깨어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식을 삼아 자신을 충전해야 한다. 그만큼 방전되게 만드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11.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씀과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현장에서 빠져나가는 것들이 더 많게 되 버리면 탈진하게 되고, 결국에는 아주 민망한 모습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단기 선교에 청년들을 자주 데려 가곤 했는데, 그 중에는 애초부터 아주 성실한 청년들도 있었고, 또 생각지도 않게 따라온 청년들도 있었다. 12.물론 현장에서는 모두들 다 감격하고 신앙적인 결단을 한다. 그런데 앞으로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고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겠다고 큰 소리치던 학생들이 몇 달 지나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토대가 약하기 때문이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주기 보다는 흔들어 대는 현실에서, 스스로에게 자발적인 영적인 충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전되어 버린 것이다. 13.전기로 가는 배가 있는데 방전되었다고 해보자, 어떻게 되겠는가? 심하면 다른 것에 부딪혀 뒤집어 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신앙적 상태가 어떤한지를 제대로 보는 눈이 있어야 우리의 신앙의 항로를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원래 우상을 섬기던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다. 초대교회에서 놀라운 일들이 발생하였으니, 사람들은 흥분하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고 교회 다니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였다. 14.그런데 바울은 단지 이런 것들을 넘어서서, 이들이 과거의 못되고 더러운 기질을 벗어나고 예수 안에 새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이들이 세례도 받고 직분도 받고 나름대로 자기는 교회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만 바울이 보기에는 아직도 이들의 미숙하고 부끄러운 부분들이 보였던 것이다. 물론 바울의 목적은 이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다듬어 지게 하는 것이었다. 15.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교회생활과 신앙적인 교리를 배우는 것 못지 않게, 공격과 유혹이 많은 현실에서 온전히 갈 길을 가기 위해서는 그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함을 알았다. 그래서 3:16에 보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라고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16.즉 순간적인 흥분이나 감격에 이끌리고 여기에서 재미를 찾는 수준의 사람이 아니라, 그 속사람이 강건해야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교인들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함을 받았다는 복음에 감격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당연히 그러한 것을 받을만한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구원받을 만큼 의롭고 훌륭하고 대단한 사람들이어서 놀라운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니다. 17.그래서 바울은 원래 이들이 거룩한 무리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상기시킨다. 12절에 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한다. /이렇게 자신들이 원래 어떠한 사람들이었음을 들추는 것은, 오늘날 상황 좀 좋아지고 분위기가 좋다고 마치 자기가 의롭고 훌륭해서 자기 덕으로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18.원래는 구원에서 멀리 있던 이방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셨다. 13절에 보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가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 우리 앞에 있는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허물어 주셨다고 한다. 사람의 부족하고 죄 된 품성이 하나님과의 거리를 만들었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원수로 여겼다. 19.하나님이 사람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는 사람들이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품격을 유지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유다가 멸망하기 전에 그들은 타락의 끝을 달렸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타락한 백성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결국 악한 일들이 만연해졌다. 20./놀랍게도 악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퍼져 나가면 그것이 나쁜 일로 보이지 않는다. 옆집 아저씨도 하고, 나의 부모님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성적으로 뿌리가 내린 악은 더욱더 큰 징계로 갈 수밖에 없다. 회개의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7장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 되려고 “힌놈의 골짜기”라는 곳에서 자식도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다. 21.자기가 잘 살겠다고 자녀를 불살랐던 것이다. 예레미야 7:32를 보면 얼마나 많이 아이들을 태웠는지, 매장할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렇게 윤리도 개념도 신앙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징계가 예비 되어 있었다.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를 알기 전에는 우상에게 마음을 바치던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이러한 수준의 생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상에 잡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에게 거리를 두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법들 또한 미워하는 것으로 대하게 된다. 22.분명히 말하지만, 사람이 하나님과의 거리가 벌어지게 되면, 나름대로 잘해보겠다는 신앙인들도 보기 싫어지고, 하나님에게도 불편한 마음을 가중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렇게 거리가 벌어진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먼저 손을 내미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자신의 죄와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23.정확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 //얼마 전에 한 찬양 비디오를 보다 밑에 댓글들을 읽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가 큰 계기가 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서 살다가 그 찬양을 듣게 되었는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과감하게 돌아가지도 못하는 약함 때문에 괴로워 하는 것이었다. 24.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무척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 죄스럽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돌아오는 행동은 못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더 찬양하고 영생을 위한 열매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방황하기만 하고 날려 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않겠는가? 이것이야 말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자신안에서 먼저 평강을 누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5.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평안을 전하심을 알게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와 상관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현실적으로 예를 들자면, 우리도 엉뚱한 소리를 듣거나 오해를 사거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6.그런 일이 교회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한 때, 자기 자리를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도 들고, 상대를 비난하고 저주하고 싶은 충동도 생기겠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해야 한다. 나의 왕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어려움을 감당하셨는데, 나는 좋은 말만 듣고, 남들이 나만 이해해 주기만 바라고 나만 위로 받기를 바란다면 이것은 자신을 연약한 상태로 방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27.그런데 이렇게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시고, 우리의 꺾이고 떨어져 나간 신분을 올려 주시는데, 19절에 보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한다. 28. 또한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는 토대 위에 하는 것이고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신앙의 길을 걷는 것을 마치 건물을 짓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 친히 되셨다고 한다. 29. 즉 교회의 간판은 예수님이신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기의 분량을 감당해야 한다. 전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영적으로 튼튼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전체가 합해질 때 온전히 설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쇠사슬을 본적이 있는가? 하나하나의 고리라 튼튼해야 단단한 쇠사슬이 될 수 있다. 30.그런데 그 중의 하나가 약하다면 전체적으로 약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전한 쇠사슬을 가지고 무거운 물건을 끌어올리는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바울은 본문의 마지막 절에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한다.
교인들 중에는 어렵거나 부끄러운 과거를 가졌던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아니하시고 오늘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져 나갈 수 있음을 알려주신다. 31.자신이 너무 늦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스스로 마음이 상한 사람은, 그만큼 열심히 전심으로 하면 된다. 우리가 애초에 구원의 레이스에 서게 된 것도 우리의 의로움이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주어진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을 때, 과거의 좋지 않거나 부정적이고 비신앙적인 기질이나 부족한 인품이 있다면, 예수를 믿으면서 오늘 하루도 스스로를 주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32.중요한 것은 매일매일 벽돌을 한 장씩이라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관적으로 말씀을 읽고 자신의 부족함을 각성하고 돌이켜 보는 일들이 이어져야 한다. /한 처녀가 있다. 엄마가 다 해준다. 처녀는 집에서 설거지도 하지 않았고, 자기 방도 엄마가 다 청소해 주었으며, 학교 갈때에도 엄마가 깨워주어야 간다. 심지어는 학교 뿐만 아니라 직장까지도 엄마가 라이드를 해준다. 33.그런데 그러던 딸이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하게 된다. 아주 서툰 요리실력으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내가 설거지 하러 시집왔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그러다 임신까지 하고 출산을 했기에 그 고통은 정점에 다다른다. 그러면서 그 분노는 남편에게 향한다. 34. 그러나 남편도 나 못지 않게 어려운 일들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산다.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다 보면 당연히 부딪히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씩 어려운 과정을 같이 겪어가면서 두 사람은 부부로서, 혹은 한 사람의 인격자로서 더 다듬어져 간다. 즉 어른이 되었기에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키워주고 성장시키며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35.마찬가지로 우리도 과거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지만, 때로는 잘못된 부분들이 시정되고 깎여 나가면서 하나하나의 집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제 튼튼하고 평안한 집이 될 때, 하나님을 온전히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모실 만큼 튼튼하고 평안한 집을 준비 하였는가? 36.예수님은 요한복음 14:1-3을 보니 제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거할 하늘의 집을 마련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주신다.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우리라는 집안에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다, 육신의 집이 무너지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서 주님이 예비하신 집에 거하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7.더욱더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살면서 좋은 집들이 되기를 바란다.
바라옵기는 자기의 과거와 아집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의지하여 튼튼해지는 성도, 그 집에 하나님을 모시고 찬양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