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7:5-14 “우리를 뚫어 보시는 하나님”
2024.5.5 주일 설교 박성일 목사
1.나는 목회를 오래 하고, 사람을 관찰하면서 성도의 성숙을 막는 본성이 몇 가지가 있음을 보았다. 첫번째는 “교만”이다. 뭔가를 조금만 하면 자기가 우월하거나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이제는 심판자의 자리에까지 앉으려고 한다. 교만은 인간이 첫번째로 저지른 죄이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교만한 태도에 대하여 강하게 다루시는지를 볼 수 있다. 2.심판의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내 입밖으로 심판과 평가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말들은 나의 영혼이 유익을 얻는 것에 대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두번째는 “변명”과 “남 탓”이다. 물론 자신의 인생 길에 방해가 되거나 어려움을 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을 전부 다 남들의 탓으로 돌리게 되면서 얻어지는 것은 패배의식과 분노 밖에 없다. 3.그러나 누구도 패배의식에 잡힌 사람 곁에 가고 싶어하지 않고, 그의 주장을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러한 태도는 결국 스스로를 더욱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어떤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다. 4.물론,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속 쓰린 일이다. 그런데 성도가 성장하고 큰 사람이 되는 과정에 있는 대부분의 일들이 이러한 속 쓰림을 경험하게 한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어려움을 준 사람을 용서한다고 해보자. 저 사람 때문에 마음 상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용서해 준다는 것이 손해를 본다는 의식을 가지게 한다. 속이 쓰리다.
5.그리고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한번 멋있게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그 사람이 전에 나에게 저지른 잘못이나 마음 상하게 했던 말들은 계속 생각난다. 잊어야지, 잊어야지 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치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 또한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않다면, 과거에 끝난 일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속이 쓰릴 수 있다. 6.그런데 이러한 속쓰림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내 안을 더 좋은 것으로 계속 채워 넣는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말씀을 읽고, 또 읽은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를 신실하게 하는 행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는 듣기 좋은 은혜 충만이 아니라, 그 안에 선하고 좋은 것들이 가득 차 있어야, 다른 것들에게 마음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게 된다. 7.우리의 마음이 은혜롭지 못한 것에 빼앗겨 버린다면, 나는 스스로 피해를 본 사람이요,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놀랍게도 나 또한 그들처럼 악하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을 우리 안에 가득 채우지 않는 것이 우리가 타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스로를 소리를 듣다 보면 이렇게 의롭고 정당한 소리가 없다. /8.우리가 누군가와 회의나 사업 때문에 논쟁을 했다고 해보자, 자기 의견과 다른데 기분 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샘 혼”이라는 여자 작가는 회의를 하다가 상대편의 의견에 대해서 반박을 할 때에, 시작하는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열어야 함을 알려 주는데, 상대편이 한참 이야기한 것에 대해서 “그러나”는 말로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9.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편은 나에게 앙심을 품게 되는 것이고, 그 이후로는 논리나 설명이 아니라 감정이 더 큰 잣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회의 시간에 있었던 상대편의 기분 나쁜 말을 가지고 와서 밤새도록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으로 해석하고 분석한다. 그 과정에 상대편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다. 10.아무튼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스스로 하고 싶어하고, 혹시 주변에 자신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주며 부추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기 쉽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자신의 아집의 소리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자기 의”가 가득한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어가기 어렵다. 11.놀랍게도 이미 누가 봐도 악을 행하는 사람조차도 스스로는 의롭다고 주장한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믿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소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이나 우쭐거리고 싶은 자기 의로부터 나오는 교만한 소리를 잘 밟아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사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중요한 가치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28살에 부목사로 섬겼을 때, 노인교구를 맡아 3년 동안 담당했다. 12.그런데 같은 노인이라도 두개의 층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원래부터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다가 나이가 드신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본인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지속적으로 참석하셔서 여전히 도움이 되셨다. 13.다른 하나는 이 분들을 교인이라고 해야 할지 말지 어려운데, 교회에서 하는 구제 사업의 대상이 되어 주로 평일에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이었다. 나름대로 사정이 딱하다 보니, 명절에 쌀도 갖다 드리고, 방문해서 사는 것도 보곤 했었는데, 놀랍게도 구제를 통해서 교회에 접촉한 사람들 중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분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14.아무튼, 진짜로 교인인 분들과, 이름은 적혀 있어서 방문하고 관리하지만, 과연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애매한 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이런 애매한 분이 세를 들어사는 집의 주인이 교회로 전화를 했다. 이유는 한 할아버지가 집에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쌓고 사는데 냄새가 나서 견디기 어려우니, 교회에서라도 와서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 갔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주운 쓰레기가 아예 들어가기도 어렵게 만든 것이었다.
15.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쓰레기인데, 그 할아버지는 그것을 왜 모았겠는가? 그것이 자기에게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모으지 않았겠는가? 오늘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자식은 물론 배우자에게도 인정 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고집만 피우면서, 영생의 길로 가자는 권유를 거절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16.그러나 우리는 나의 중심, 나의 마음은 과연 좋은 것들로 가득 찬 값진 것인지를 냉정하게 돌이켜 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마음에 악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은 심판하시게 된다. 수많은 기회를 주고, 인내하고 기다리셨지만, 이들은 자신의 조상들보다 더 악해졌다. 17.16:12절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리고 이러한 악함과 불순종의 대가는 자신들이 사는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또 15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들을 조상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니 이들을 징계하는 것은 이들을 패망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좋은 말로 해도 각성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회초리였다. /18.그럼에도, 이렇게 마음이 완악하고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는 두려움과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보고 거기서 얻은 느낌으로 일을 한다고 한다면, 아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가 외톨이가 된 느낌마저 들었다. 세상이 다 타락하고 악하게 가는 것이 대세인데, 여기에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19.이러한 그의 상태는 15:17에 적혀 있다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라고 한다. 그 가운데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하나님의 입이 될 것이라고 하시며, 여전히 예레미야가 이 외롭고 어려운 싸움을 싸울 것을 전달하신다. 20.그러시면서 같은 장 20-21절을 보니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서 견고한 놋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고 하신다.
때로는 세상의 흐름이 악하다고 해도 거기에 휩쓸려서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 쉽고 좋아 보인다. 또 그 안에서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어느새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말보다 중심에 가게 되고 의지가 되기도 한다. 21.그러나 하나님은 본장 5절에 분명하게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힘을 삼고 여호와를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는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7절을 보면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22.이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잎이 청정하고, 가뭄이 드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누구나 생산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도 말라버린 가지가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맺는 성도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누구라도 이렇게 생산적이고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렇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열매가 없다. /23.이제 결혼하는 한 쌍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은 앞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한다. 모두들 그렇게 말을 한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으로 좋아 보이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이나 성장 없이 그것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고 순종하는 상태는 그것이 좋아 보이니 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4.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람에게 눈이 돌아가고 의지를 삼는 사람에게 징계를 경고하시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다. 아마 교회에 오래 다닌 누구라도 하나님께 전심을 드리고 집중하는 것을 원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탓이라기 보다는 바로 내 마음안에 있는 것이다. 25.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버리고 우상에게 눈이 돌아가고 악을 행하게 되었던 이유는 바로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마음이 들려주는 거짓의 소리를 즐거워하고, 참으로 진리이시고 살 길인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다. 본문 9절을 보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곧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아멘”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마음을 꺼내 보았을 때, 부패해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26.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겉모습이나 드러난 것으로 평가하고 값을 매기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 기분 좋게 들리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의 온전한 가치는 도대체 어떻게 드러내겠는가?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러한 부족한 상태를 포장하고 꾸며서 그럴듯하게 보이게 한다. 27.나는 목회를 하면서 자신이 했던 작은 일이나 어쩌다 한 일을 마치 항상 하는 것처럼 꾸며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어떤 분이 어쩌다 한번 새벽기도에 나왔다. 그래서 기도하러 나왔나 보다 하고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떤 모임에서 차례대로 돌아가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고,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는데, 자신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하루를 이렇게 시작한다고 하며 아주 은혜롭게 말을 하는데, 누가보면 꾸준하게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인 줄 알도록 말하는 것이었다. 28.마찬가지로 현재는 형편없이 망가진 믿음과 영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과거에 자기가 어떤 유명한 목사님 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았고, 어느 단체에서 뭘로 섬겼다고 하는 것들은 사실 오늘날 자신의 상태를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까지 속이며 기만하는 것들도 결국은 그 진위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29.예수님은 누가복음 8:17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하신다. 우리가 자신을 돌이켜보며 회개하고 청소하고 깨뜨릴 것은 깨뜨리고 버릴 것은 버리는 자가 될 때, 즉 자기 의나 자기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진정한 성도가 될 때, 이제 우리는 추하고 혐오스러운 번데기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모두를 기쁘게 하는 나비와 같은 상태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30.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10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라고 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무거운 존엄 앞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흙에 기록된다고 한다. 우리는 생명책에 기록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31.그 신앙생활의 형편 없음, 그리고 그것의 근간이 되는 마음의 약함과 더러움으로 인해서 수치를 당하는 성도가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순종과 찬양과 감사의 고백과 행실이 가득해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보시는 하나님께 행복을 드리는 기특하고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거절하는 상황에서 마음도 상하고 외로움도 느꼈다. 32.사실, 자기의 외로움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비록 자기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러한 실망감이 하나님과 더욱 단단히 연결되므로 해소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래서 비록 자기가 근심에 힘들어 했고, 마음도 약해지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14절에 이렇게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33.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소외 당하고 거절 당하고 그렇게 마음이 상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속까지 들어오시는 분이신 가장 친밀한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 가운데 찬송을 하게 된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과 이렇게 친밀함을 유지하며, 그 거리를 가깝게 할 때, 마음을 흔드는 고독과 외로움과 불안함을 넘어서서 오히려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며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것이다. 34.찬송가 292장의 마지막절 가사는 이렇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르고,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사나운 풍랑 일 때 날 지켜주시니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됩니다. 3절의 가사도 보면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밖에 나의 마음 뉘 알아주리요 내 마음 위로하사 평온케 하시네.” /35.나를 나보다 더 깊게 꿰뚫어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때로는 외롭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분으로 바라보고 그 마음을 잃지 않을 때, 가장 타락하고 부패하기 쉬운 그 마음이 주님께 향유를 담은 옥합이 되어 주님의 기억에 남고, 보좌에 올려지는 것이다. 36.썩은 마음으로 끝나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반드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사람들에게 휘둘리면서 마음이 부패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나의 찬송이신 하나님께 집중하고 의지하므로 구원을 얻고 칭찬을 얻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