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1:23-34 “죄악을 기억하지 아니하실 하나님”
2024년 5월 26일 주일예배 (박성일 목사)
1.사람은 자기 수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생각하기 쉽다. 예를 들어서 어떤 한국 할머니는 손자나 젊은 사람을 보면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하루에 세끼를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렇게 제 때 밥을 챙겨먹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 할머니는 전쟁을 겪고서 배고픔의 아픔을 경험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배고프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사실 손자는 이미 맛집에 가서 요새 유행하는 디저트를 먹고 다니기에 굳이 시간에 맞춘 세끼의 식사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2.즉, 나는 어떠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도, 그 생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분노하게 만든 사람이 있어서 평생 그 사람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교회에 왔는데, 용서하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어렵게 어렵게 용서하였다. 그런데 용서한 줄 알았지만, 갑자기 과거의 불편한 감정이 불같이 솟아오르며 마음 속에 분노가 꿈틀댄다. 그러니 전에는 용서했지만 지금은 용서 못하는 것이다. 3./사람이 과거의 불편한 감정, 오늘날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을 씻어 낼 수 있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이요 또한 신앙생활의 아주 중요한 터전이 된다. 자기의 마음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다면, 설사 좋은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의 씨앗을 심지 못하고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가 과거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또한 보게 된다. 말했듯이,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4.어느 전방의 부대에 사단장(2 star general)이 병사들을 생각해서 자기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병사들과 같이 식사를 하고, 병사들 틈에서 같이 자고, 병사들과 같이 축구도 하면서, 자기는 지휘관이라고 특권의식을 부리지도 않으며, 병사들의 삶을 이해하는 깨이고 사랑 많은 장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자신만의 생각일 것이다. 병사들은 왜 사단장이 자기들과 같이 생활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오지 않는 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다. 5./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이 자기가 남을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을 품고 있기때문에, 심지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의 씻으신 예수님의 공로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저것을 믿는 것 같다는 감정이 생기는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성을 세우고 기준이 될 정도의 확실함으로 성장할 때, 제대로 된 것이 된다. 6.즉, 그럴 것 같다고 믿는 것과 확신을 가지는 것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본인도 어린 나이에 옥스포드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영성생활도 하고 심지어는 당시의 개척지인 아메리카에 선교사로도 갔다. 그런데 모든 일들이 자기가 예상하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심지어는 식민지로 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항해를 하면서 공포에 떠는 스스로를 보았고, 그래서 더 자신감을 잃어 버렸다.
7.그러나 1738년 5월 24일 런던의 올더스게잇(Aldersgate) 거리에서 있었던 모임에서,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자신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자신의 죄가 사함 받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이제는 확신으로 변한 것이었다. 이러한 확신은 그에게 능력이 되었고, 선교지에서 실패하고 낙심하였던 35살의 웨슬리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흔들 능력의 사람이 되었다. 이날 있었던 일 때문에, 그의 키가 큰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진 것도 아니다. 8.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들였다. /우리도 같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능력을 얻을 수 있다. 목회자만 능력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도 능력을 얻어야 온전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다. 한번 신앙생활을 하는데, 껍데기만 있고 속은 비어서 힘도 없고 바람에 날리는 쭉쟁이 같은 성도가 아니라, 그 안이 가득 차 있어서 농부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곳간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9.안타깝지만, 오늘날 심지어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수준으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준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맞추어야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제 징계의 문 앞에 선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세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유다는 이미 우상숭배와 살인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차적인 징계를 받았다. 10.당시 세상을 삼키던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자신들이 쓸만한 기술자와 지식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고,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 이 때 잡혀간 포로 중에는 선지자 “에스겔”도 있었다. 에스겔은 잡혀간 바벨론에서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였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패망까지 목도하고, 역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돌아가게 된다.11. /이렇게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셨으며, 망해가는 예루살렘에서도 그들과 함께 할 예레미야를 일하게 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망가진 상태로 있었던 유다의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변의 사람들은 다 이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한다. 12./1975년 4월에 월남이 망할 때, 공격을 시작한 월맹은 “티우” 대통령을 밀어내면 남쪽 정부와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티우가 밀려나니, 망해가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기네가 한 자리 하겠다고 파리떼처럼 몰려든 정치인들이 있었다. 공산당과 잘 협상하면 좋은 상태를 유지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궁으로 진입한 월맹군 소령은 이제 협상하자는 정치인들에게 무슨 협상이냐며, 당신들은 우리 포로라고 했다. 결국 월남의 정치인들은 월맹의 이간책에 놀아난 것이다. 13.예루살렘이 이런 수준이었다. 이렇게 심각한 오판을 하였기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다시 침공당하고 결국은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많은 수의 백성들이 다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버린다. 예레미야는 20여년간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치며 백성들이 회개하기를 바랐지만, 이들이 그들의 죄값을 해결한 방법은 회개라는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징계를 몸과 맘으로 받는 가시밭길로 미련하게 들어간 것이었다. 14.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졌다. 하나님은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떠나고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에 미련을 두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징계의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마음을 가진 백성들이 돌아와서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울 것을 기대하셨다. 그래서 에스겔을 보면, 환상 중에 그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새로 지을 성전의 구조와 치수까지 꼼꼼하게 지시하신다. 즉 새로운 성전을 원하는 간절함이 누구보다도 강력했던 분은 하나님이셨다. 15./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유다가 너무나 타락해서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징계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회복된 세상을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본장 4절은 이렇게 말한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다시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게 춤추며 나오리라” 그러면서 산업이 다시 시작되고 사방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모일 것이라고 한다. 16. 9절에 보면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그러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하신다.
이렇게 포로된 생활에서 돌이켜 고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떼와 소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며 그 심령이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겠다고 하신다. 17.13절을 또 읽겠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 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제사장들도 마음이 흡족하게 되고 백성들은 만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아예 징계를 주시지 않고 애초에 좋은 것만 주셨으면 되지 않았겠냐고 할 것이다. 예레미야 30:14-15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 때문에 원망의 소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징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알리신다. 18.이미 그들의 악행이 많고 죄가 허다하기에 이런 징계를 실행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징계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은 그들에게 수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죄 값을 치르고 돌아오게 될 때, 이미 무거운 멍에가 벗어졌으므로 사람들은 선한 것을 기대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이런 격변의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부담도 생기고 걱정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예루살렘은 이미 좋은 것들이 가득한 곳이 아니라, 무너진 곳이요, 이제 새로운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 일으켜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25절에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며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음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걱정과 잡념으로 어지러운 우리의 심령을 상쾌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20.사람이 자신의 심령을 상쾌하게 하는 힘을 얻어야 힘있게 살아갈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물 댄 동산에서 자라나는 심령처럼 하나님과 꾸준하게 교통하여 말씀으로 생명수를 공급받아야 그 안에서 다시 잘 해보자는 상쾌한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순간적으로는 깊은 물에 있었지만 그 이후로 물을 공급하지 못해서 말라버린다. 21.어떤 사람은 겨우 목을 축일 정도의 물만 받기에,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길 힘도 없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끌고 갈 역량이 있을 리 없다. 하나님은 전에는 이들을 징계하시며 그 땅에서 뽑으셨지만 다시 세우며 심으시겠다고 하신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은 당시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고 한다. 22.즉 우리가 자기 생각대로 이동하는 것 같고, 또 뜻하지 않게 있던 곳에서 떠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죄에 빠져 있었을 때에는 그곳에서 밀려났지만, 이제 죄값이 해결되었기에, 놀랍게도 하루아침에 포로신분에서 해방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23.과거에 출애굽 할 때에 하나님은 노예생활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질서와 법 아래에서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셨는데, 이러한 요구와 약속을 다시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겠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속에 불편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 조상들이 너무나도 악한 죄악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도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손자에게 준다. 24.그렇게 자신은 후손을 통하여 연계됨을 의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부모가 악인이었다면, 예수를 믿어도 그 마음 속에 거리낌이나 불편함이 있을 수 있다. “연좌제”는 오늘날 폐지한 나라들이 많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자유 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과 사이가 안 좋은데, 그런 마음으로 보면 그의 아들도 보기 싫어 진다. 고대에 가장 큰 죄는 반역죄였는데, 우리 조상들도 삼족(3 generations)을 멸하였다. /25.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온다고 해도, 자기 아버지나 조상이 저질렀던 끔찍하고 민망한 죄를 생각한다면, 자신 또한 그러한 피에 의해서 영향 받는 존재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우리 죄가 씻음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우리가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마음의 상태로는 확신도 들어서기 어렵고, 당연히 주어진 좋은 것을 누릴 능력도 없게 된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길러 주신 고마운 분들이지만, 세상 모든 부모가 하나님 보시기에 떳떳하고 훌륭한 분들인 것도 아니다. 26./1980년대에 한국에서, 술만 먹으면 아내를 때리고 아이들을 괴롭히는 못난 아버지들이 많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대부분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잘못된 습성을 반복한다고 한다. 자기 어머니가 타락한 사람이라면, 자기 인생을 윤리적으로 살려고 노력 하다가도, 자기의 엄마 탓을 하며 유혹에 빠지기 쉬울 수 있다. 이러게 자신의 조상을 보면, 과연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두려움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27.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안심으로 바꾸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열등감이 아주 없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오히려 우리의 찬양을 증폭시키는 소재가 된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돼지를 혐오해서 먹지 않는다. 실제로 돼지에서 생긴 질병은 유럽인들과 함께 하다가, 대항해 시대에 수 많은 중남미의 원주민들을 죽게 만들었다. 28.돼지는 더우면 물에 몸을 뒹구는데 이런 여건이 되지 않아서 오물에 몸을 굴리고, 그래서 돌아다니다 보면 사방에 병을 퍼뜨렸던 것이다. 마치 흑사병을 쥐가 옮긴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오물도 땅에 들어가면 우리가 먹는 귀한 식량을 자라게 하는 영양분이 된다. 더러운 것이지만 땅을 통하여 그 가치가 변화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과거에 대한 자괴감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제는 하나님 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29.사람은 그 부모의 오점과 자녀를 같이 보지만 본문 29-30절을 보면 신포도를 먹는 비유를 통하여,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다고 아들들의 이가 시리지 않다고 하며 이처럼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고 하신다. 이것은 대단한 자유의 선언인데, 네 부모가 잘못이 있으니 너 또한 같은 인간으로 취급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너의 신앙과 올바른 행동으로 인해 거기에 상응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30.웨슬리가 속회를 만들 때 목적은 피폐한 산업혁명의 현장에서 살며 술과 여자로 타락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상황과 사회에 탓을 올리지 않고, 각자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살아야 함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즉 자기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지우는 것이 속회의 목적이었다. 게다가 34절에 보면 하나님은 과거의 악행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31.사람은 용서한 것 같으나 마음 속에 응어리를 남기는 수준이지만, 하나님은 과거의 죄를 아예 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는 스스로의 부족함과 선대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나에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근심을 기쁨으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물이 흐르는 동산에 거하는 나무 같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집안이나 과거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진정한 우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32.시편 2:7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신다. 과거에는 죄의 영향에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딸이 되어서 우리에게 선한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행복하고 상쾌한 인생의 소유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자기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서서 책임을 감당하며, 물 댄 동산과 같이 상쾌함을 늘 누리는 역량 있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