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훈련
기도의 훈련 1.
사람들은 공짜를 좋아한다. 기도하지는 않으면서 높은 영성을 원하고 하나님의 평안과 행복을 바란다. 영으로 심으면 영이고 육으로 심으면 육이다. 육으로 심고 영을 바라는 자신의 헛된 바램을 하나님 은혜로 받을 수 있다고 합리화하지 마라. 도둑의 심보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가벼운 산책 정도라면 크게 체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높고 험한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강한 체력이 필수적이다. 기도의 깊이를 체험하고 영적인 세상의 기쁨을 누리려면 꾸준하고 집중적인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쉽게 얻는 방법은 없다.
높은 수준의 기도의 영성을 위해서는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하다.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 2연패를 한 장미란 선수 하루 50톤의 무게를 들었다고 했다. 세계 정상급 농구 선수는 하루 1000번씩 자유투를 연습한다. 영적 체력이 강해지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기도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 속에 영적인 신앙의 선배들을 보라. 우리와 심성은 같으나 기도의 열정은 남달랐다. 존 웨슬리의 기도방의 바닥은 무릎으로 파여 두개의 두멍이 있을 정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했다고 했다(고전 9:27).
영적인 복을 얻으려면 꾸준히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중 외부적으로는 고난이 심심찮게 있어 마음이 힘든 상황이라면 참 감사할 환경이다. 기도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편할 때는 세상 것들이 허망한 줄 모르다가 그런 것들이 완전히 죽기 일보 직전까지 망하거나 자기 손을 허무하게 떠나면 그제야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욕망으로 사로잡혀 보이는 세상에 속은 것이다. 고난을 겪고 망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에 물든 어리석음을 깨는 좋은 약이니 그런 일 당해도 슬퍼할 일이 아니다.
기도의 훈련 2
그러나 기도의 근육을 키우려면 구체적인 훈련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기도의 사람이 되려면 자기 단순화, 마음과 의지의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욕망으로 세상의 복잡함에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울타리를 둘러야 한다. 연인 간에 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은 정말 죽을 일이 아니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 모든 것을 핑계로 여기고 그 시간을 지켜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연인처럼 좋아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헌신된 시간과 훈련 없이 영성은 없다.
우리는 매일 세상 욕망으로 분주하면서 생수를 바란다. 기도의 훈련을 위해서는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기도에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다. 세상의 재미에 비해 기도는 지루하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에 중독(?)되기 전까지는 우리의 에너지를 빼앗고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차단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도록! 특히 중독성이 강한 페이스북, TV, 인터넷에 빠져 있으면 영성은 물 건너간다. 방해요소를 철저하게 차단해 기도에 집중할 수 있다. 그래야만 번잡한 생각 감정의 복잡함이 통제되기 시작하고 비워질 수록 세상이 줄 수 없는 고요함과 평온이 점점 찾아오게 된다. 이는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은혜를 찬미한다. 그러나 누리고 싶은 것이지 막상 누리지는 못한다. 정말 꾸준하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그저 말로만 그 은혜를 누릴 것이다. 아니면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면서 누린다고 자기와 남에게 반복적으로 말을 해야만 하는 자기 기만적인 거룩한 연극을 하거나. 필자의 경험과 관찰로는 영성의 보물은 어마어마 한 것이지만 이 길은 좁고 험하여 찾는 이조차 드물고 이를 현실 속에서 누리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도는 고되고 힘든 노동이다. 재미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이처럼 기도하라고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 말래도 누구나 열심히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재미없는 일임은 틀림없다. 깊이 빠지기 전까지는!
기도의 영성은 꾸준히 노력해도 돌아보면 별 효과가 없는 것같이 느낄 정도로 성장이 느리다. 기분이 좋을 때는 성장했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물거품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꾸준하면 반드시 효과는 있다. 그리고 끝이 없이 문을 두드리고 찾고 노력하는 과정을 걸치지만 결국 영성에 관한 모든 것이 기도자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영성의 핵심은 기도자의 수동성이다. 특히 지복의 상태를 맛보면 왜 이런 선물이 자신과 같이 부족한 자에게 주어지는지 알 길이 없어진다. 결국, 기도의 영성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다. 그러나 그 은혜를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자에게 그 선물은 주어지지 않는다.
영적 충만함을 체험하면 할 수록 과거의 모든 상처와 쓰라린 기억, 갈급함이 사라진다.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영적인 체험을 지나치게 감정적인 느낌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강렬한 카타르시스적인 흥분,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랑이나 모든 상처와 외로움, 우울감, 불안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황홀경을 성령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환희와 감동을 약속하는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신앙 서적들, 영화같은 간증,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찬양 집회와 말 잘하는 사역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우울해한다. 일종의 영적 쾌락주의다. 천박한 영적 마약에 취하고 중독된 증상이다. 올바른 기도를 분별하는 방식은 무엇을 체험했느냐가 아니라 체험을 통한 어떤 열매가 맺혔는가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주인 되심으로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