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28절과 고난에 대한 바울의 이해
구한말 우리 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복음 전파는 물론이요 한국 문화와 독립을 위해서도 애썼던 헐버트 박사는 그의 저서인 「대한 제국 멸망사」에서, 한국인의 종교는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한국인에 대하여 이런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도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도이며, 고난을 당할 때는 영혼 숭배자 즉 미신적이 된다. 따라서 어느 한국인의 종교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가 고난을 당할 때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보면 된다.”
참으로 탁월한 분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한국인들의 삶의 규범은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우리의 명상과 사색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불교적 사상이었다. 그러나 무슨 종교를 가지고 있든, 뜻하지 않은 고난을 당할 때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미신적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난을 피하려 하거나 그것에 굴종하려 했지, 주어진 고난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그 고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극복하려고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그리스도인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안타까운 것은 고난 앞에서의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도 그리 크게 다르지는 않다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뜻하지 않은 사고나 고난을 당했을 때, 그런 상황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한국 단군교 교주를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김해경 씨가 쓴 글을 보면, 그가 서울 시내에서 용한 역술가로 활동하던 시절에 그의 고객들 중 상당수가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사고가 터지거나 역경이 닥치면 돈 내고 점쟁이에게 와서 묻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규범과 사고를 가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참다운 신앙 여부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참다운 신앙은 ‘고난의 때’에 판가름난다. 원치 않은 고난을 당했을 때 오히려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더 깊이 신뢰한다면, 그는 이미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다. 그러나 고난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고 주님을 불신하게 된다면, 아직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일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믿음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하기에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인 것이다. 입으로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인생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이 내게 주신 상황은 믿지 않고 배척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비록 실패하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한 채 실패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하기 때문에, 정말 인생의 전환기가 될 수 있는 ‘실패와 고난’을 맞이하고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되지 못한다. 또한 병들었을 때에, 질병으로부터 탈출하기만을 원하기 때문에 그 질병 속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지 못하게 된다.
고난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또 견디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고난 중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고난이 주어졌다면, 그 고난은 반드시 나의 유익함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고난 앞에서의 이런 연약한 모습들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안타까운 현상들이다.
이 글은 로마서 8장 28절을 중심하여 바울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 고난의 사도, 바울 ]
아마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 중 바울만큼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요하네스 슈나이더(Johannes Schneider)는 “누구든지 바울 이야기를 쓰려면 그의 고난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바울이 당한 고난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바울의 자서전적인 기록인 고린도후서는 그의 ‘고난의 목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중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1:8~9)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4~5)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11:23~27)
의심할 여지없이 어느 누가 보아도 바울은 ‘고난의 사도’였다. 그렇다면 이런 극심한 고난 앞에서 그의 자세는 어떠했을까? 좀더 실제적으로 이 질문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우리가, 바울이 처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고난을 당했더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흔들림 없이 계속 주님을 따랐을까?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찼을까?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고난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것이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1) 고난은 위로와 능력을 동반한다
아무튼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주님을 따랐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고난 이해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이유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즉 자신이 믿는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후 1:3). 위로자 하나님! 이것은 바울이 체험했던 하나님의 중요한 모습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위로하셔서(고후 1:4),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그와 같은 위로를 형제들과 서로 나누도록 하시는 분으로 알았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Christ) 당하는 고난은 위로와 능력을 동반함을 알았다. 이 위로와 능력은 그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한 결과로 생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평안은 그만큼 더 깊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런 하나님을 믿었기에,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위로가 더욱 넘친다고 고백했던 것이다(고후 1:3~6). 한마디로 바울이 고난을 오히려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2) 현재의 고난보다 미래의 영광을 보았다
또 한 곳, 그의 고난에 대한 자세를 더욱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 있다. 그것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데, 바울은 그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서 생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남긴 교훈의 주된 골자는, “네(디모데)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복음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고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유언을 남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에게 말이다. 우리 같으면 마땅히 “행복해라. 건강해라. 너는 결코 나처럼은 되지 말아라”는 등 다른 말을 했을 텐데, 바울은 왜 그런 유언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반증이다.
어찌 고난이 축복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부탁해야 할 말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고난이 좋아서가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고난, 그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 이렇게 권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그 미래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 내가 복음을 위해 매를 맞지만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면 영광으로 바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날에는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고난을 기뻐할 수 있었다. 또한 가치평가의 기준도 달랐다. 사람들에게는 현재가 중요하지만 바울에게는 현재보다는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날이 중요했다. 그날을 중심하여 현재를 평가하는 ‘미래 지향적 가치관’을 가졌기에, 매를 맞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인 것이다. 약속된 미래, 확실한 소망만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다 정당화 될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것이 바울의 고난관이요 가치관이며 행복관이었던 것이다.
(3) 고난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한마디로 바울은 고난을 이해하기를 단순히 죄의 결과나 혹은 우연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분명한 목적-훈련으로서의 고난, 교육적 목적, 그리고 구속적인 목적-을 갖는다. 바울은 옛 시대와 새 시대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난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딤후 3:12).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와 후사(상속자)가 되었는데, 장래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롬 8:16~17). 하지만 그 고난은 일시적인 것이고 영광에 이르는 수단일 뿐, 고난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결코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늘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고난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로마서 8장 28절에 나타난 바울의 고난 이해 ]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두 가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과 “신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1)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먼저,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정의하기를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 주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제물로 내어 주셨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확인되었고, 성령을 통하여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롬 8:32). 그 결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 주셨고, 우리의 ‘아바 아버지(아빠 아버지)’가 되셨다(롬 8:15).
이제 그 아버지께서는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을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모든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계신다(롬 8:32). 어떤 때는 우리가 극심한 고난과 고통과 슬픔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역사 속에 그 어떤 일도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손길 밖에서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이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환경과 상황을 초월한 감사와 기쁨과 소망의 기초가 있는 것이다.
(2) 신자의 정체성
두 번째로 바울은 ‘신자의 정체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자는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고, 또한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예정되고 선택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28절)이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이 그 주체가 되고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부르심을 의미한다. 신자들은 복음을 통해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한 ‘영화롭게 된 자들’(롬 8:30)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확고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또한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한다. 신자들의 궁극적인 위안과 확신은 그들의 현 존재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 속에 뿌리박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을 때 주어질 수 있다. 즉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신, 이것을 분명히 믿을 때에 신자는 환난 중에서도 끊임없는 위로와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교리가 고난 당하는 세상의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것을 성도들이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로마서 8장 후반부인 35~3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다. 신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세상의 고난과 재앙과 위험들도 그렇게 할 수 없다. 35절에서 바울은 일곱 가지의 고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을 열거한다. 이러한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이었으며, 동시에 바울의 고난이었고,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감내해야 할 고난이다. 특히 ‘칼’이란 고난의 의미는 최종적인 죽음을 뜻한다. 즉 신자들에게는 피를 흘리며 죽기까지 고난을 각오하는 삶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36절에서 그러한 경험을 인용으로 처리한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시 44:22). 이러한 죽음을 각오한 삶은 승리를 약속한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이 없는 승리의 삶이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이 십자가의 진정성을 더욱 더 확실히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피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우리 모두는 자원해서 이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신자들은 이 모든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37절). 이렇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신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어떤 영적인 세력들도, 그리고 피조 세계의 어떤 요소들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 중에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영적 무지’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확신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광야와 같은 세상이지만,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
신앙이라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앙인은 날마다 바뀌어져 가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바꾸어 말해서 날마다 주님 앞에서 변화되어 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바른 앎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마 이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친근감 있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아바’ 즉 ‘아빠’가 되신다고 할 수 있다(롬 8:15, 막 14:36). 아빠라는 호칭 앞에서 아이는 아빠에 대하여 모든 권리를 가지는 반면에, 아빠라는 호칭 앞에서 아빠는 아이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진다. 아빠가 아이와 함께 있는 한 아이는 아무것도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아빠’라는 호칭보다 더 좋은 호칭은 없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바로 우리의 ‘아빠’이시다. 자녀 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는 사랑의 아빠이신 것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여인이 자기 태에서 난 젖 먹는 자식을 잊을찌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사 49:`15~16).
참된 신자라면, 이런 ‘아빠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믿어야만 한다. 고난이 닥칠 때 하나님 없는 고아같이 낙심하며 당황하기 전에, 먼저 ‘아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는 ‘생각이 배제된 믿음’은 맹신이 되기 쉽고, 맹신은 우리를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참되고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언제든지, 특히 고난이 닥쳐올 때는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고, 생각하면서 믿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눅 12:24).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눅 12:27~28).
주님께서는, “생각을 좀 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을 나는 새를 깊이,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를, “철저하게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신다. 그 미물들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기르시거늘,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한 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잠시라도 철저하게 생각해 본다면, 불필요한 근심과 불안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느냐?”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아빠가 되시어서 늘 함께 하시며, 구하기 전에 우리들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며, 또한 아실 뿐만 아니라 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마 7:9~11).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난과 역경과 실패가 나에게 주어졌다면, 그 과정을 통해서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에, 나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우리는 그 상황을 소망 중에 믿음으로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아버지 곁에서 살면서도,‘아버지’를 믿지 못해 마치 ‘고아’처럼 살아가는 어리석음과 불신앙의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제는 과거와는 달리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히 의지하고 따름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아버지의 자녀삼아 주신 그 귀한 뜻들이 자녀 된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이 땅에 아름답게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고난 앞에서, 성도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바로 알지 못하면, 결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무엇이라고 고백했는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는가?” 정말 그렇지 않은가? 벌레만도 못한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송두리째 제물로 내어놓으셨던 그분,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던 하나님께서, 내가 잠시 이 세상을 다녀가는 동안에 “내가 그분을 위해 살겠다”고 내 삶을 드릴 때, 어찌 그 사랑으로 나의 일평생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는가?
[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라 ]
오늘 한국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며,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다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고백이다. 적어도 이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자기 계산과 어긋나는 결과가 주어졌을 때, 재난이 닥치고, 병이 들고, 고난이 올 때 절망하고 근심하고 불행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경우든지 불행이나 절망은 있을 수 없다. 한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결단코 불행으로 끝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결과를 주시기 위해 그런 상황을 연출하실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따라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고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혹시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해 있을 수도 있다. 질병 중에 있을 수도 있고 핍박을 받으며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혹시 인생에 안개가 끼어 앞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다면, 고난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는 이제 달라져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 없는 자들과는 구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주셨다면, 그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그 병 때문에, 그 상황 때문에,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은혜가 있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의 삶의 자세인 것이다.
이제 모든 성도들은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선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요 순종이며, 이 터전 위에서만 인간의 절망과 근심과 두려움은 종식되는 것이다. 아니 이 기초 위에서만, 인간은 참된 평강과 소망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런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한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