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2.16 마태복음 23:1-12 “구별해서 듣는 자” (박성일 목사)
1.사람이 가지는 중요한 마음의 상태가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한국에 한 사병이 있었는데 계급은 병장을 달았지만, 고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주변에서 자기를 병장 대우해 주지 않았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이 병사는 동료 병사 5명에게 총기를 난사해서 살해하고 도주하였다가 생포되었다. /2.어디서나, 자신을 무시한 사람에 대해서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동시에 생겨나는 마음은 “내가 남보다 내가 우월해서 남들을 깔보고 싶다”는 것이다. 남들이 자기를 무시했다고 분노했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 생기면, 잘난 척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3.놀랍게도 자기가 무시 받던 것 때문에 예민하고 고통받던 사람이 또 금방 남을 무시한다. 군대에서 고참들에게 많이 맞은 병사가 나중에 고참이 되면 최고 악질의 고참이 되고, 시어머니에게 많이 시달린 며느리가 나중에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똑 같은 식으로 되갚아 주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에는 남들보다 높아져서 상대를 짓누르고 싶어하는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4.심지어는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열심히 버는 이유가 자기를 무시한 사람을 꺾기 위한 것이 목표인 사람도 있다. 물론 무시당한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요, 오래 가는 감정이 발생한다. /나는 한국에서 목회하다 미국에 유학생으로 와서 처음에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동네에서 학교를 다녔다. 대부분이 백인만 있는 동네였다. 5.자동차 면허를 따러 갔더니, 영어를 못하는 줄 알고, 내 서류를 들고서는 DMV 직원끼리 “이것 봐 남편과 아내의 성(surname)이 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트에 가면 나를 꼬마들이 뚫어지게 처다 보았다. 아마 카운티(county) 안에 한인 가정이 열 집도 안 되었을 것이다. 6.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내가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차별했을런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 피해의식이 없어서 그런지, 그것이 내 안에 박힌 기억은 없다. 나는 자기가 피해의식을 가지던 사람이 어느 날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더 치졸하게 자기가 가진 권력의 구석구석까지 다 찾아가며 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가 막힌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서게 된 것을 “정의의 승리”라고 하였다. 7.한국사람들은 나이를 통한 우열의식이나 서열에 대한 생각이 깊어서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오면 견디지를 못한다. 나는 학교를 남들보다 한 살 일찍 들어갔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니 입학 시험에 떨어져서 1년 늦게 들어온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그래도 학년이 같으니 그냥 친구로 지냈다. 대학에 가니 역시, 재수를 해서 들어온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8.태어난 연도가 나보다 빠르니, 동기가 아니면 형이라 했겠지만, 학교나 군대나 사회나 나이가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기에, 동기로 지냈고 기분이 나쁜 것이 눈에 보였다.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아도 늦게 들어온 후배들은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도 선배가 선배답지 못하고,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면 권위도 다 사라진다. 9.권위라는 것은 존경심 위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떤 엄마는 십대의 딸을 라이드 해주면서 매일 차안에서 우는 소리를 한다. 그것을 보고 어린 딸이 엄마를 어른으로 존중하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베풀고 봉사할 만한 여유를 가지는 사람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10.본문 11절을 보니 예수님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칭하시면서 가르치신 것인데, 사실 제자들도 예수님의 기준에서 보기에는 떳떳하지 않았다. 11.바리새인과 서기관은 현재 기득권을 가지고 높임을 받는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한 욕심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항상 부자들을 욕하는 사람이 진짜 돈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곤 하였다.
예수님에게는 12 제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딱 12명이랑만 다닌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따로 칠십인을 세워서 파송 보내셨다고 하고,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열 두 제자 외의 제자를 구분하며, 예수님을 떠난 다른 제자들이 많았다고 한다(66). 12.또한 이 무리를 위하여 식사를 제공하는 여인들의 무리도 있었다. 이들은 일부러 멀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라오기도 하였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리는 숫자가 적지 않았고, 그렇기에 체계를 갖추어서 회계를 담당하는 사람도 따로 있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가룟 유다가 회계였다. 13.그런데 당시에 예수님은 인기도 좋아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제자들이 이것을 자신의 이익과 결부해서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영생의 열망을 찾아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쫓던 사람들이 이제 현실에서 좋은 조짐이 보이자 그것을 통하여 자기가 얻을 유익에 대해서 눈이 돌아가게 된 것이다. 14.우리도 처음에는 열정과 기쁨과 순수함으로 교회일을 하다가 변질되어 버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교회 혹은 교단이라는 간판을 달고서 변질되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교회에 몸은 담그고 있지만, 다른 것에 휘둘려서 머리는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도 있다. /15.오래 전 이야기다. 한 여자 집사님이 교회를 기쁨으로 섬겼는데, 집안 경제에 도움이 될까 해서 콩나물을 시장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런데 콩나물이 팔리면서 돈을 버는 재미가 쏠쏠한 것이었다. 그래서 주일에도 오전 10시50분까지 콩나물을 팔고 11시 예배에 맞춰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들어오곤 했다. 16.그런데 어느 주일도 그렇게 했는데, 막 예배당에 들어오는 자기에게 목사님이 이 집사님이 대표 기도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급한 마음에 마이크 앞에 섰는데, 기도하려고 입을 열자 이런 말이 나왔다 “하나님, 콩나물 한단에 500원입니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나서야 자기가 변질되었음을 깨닫고 회개했다고 한다. 17.마태복음 20:20절을 보면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령해달라고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이 십자가의 길, 어려움의 길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눈 앞의 명예와 남들에게 세 보이는 것에 눈이 팔린 제자들의 현실을 보았다. 18.이 일로 다른 열 제자들이 분노하였다고 한다(24). 그러니 이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제자들 사이에서 분열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목회자를 가장 타락시키는 방법이 명예욕인 것을 종종 보았다. 평신도도 마찬가지이다. 19./목회자가 돈이나 이성 문제에 하자가 있으면 이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드러나지만, 명예욕을 위해서는 사람을 끌어 모이고 당을 짓게 되고 나름대로 그럴듯한 명분을 붙이기 때문에 나쁜 것으로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분열과 갈등의 골을 깊게 하고 교회에 오명을 끼친다면 벗어나야 할 것이다. 20.마가복음 9:34를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말싸움을 하였다. 누가복음 22:24를 보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너무나 어려운 그 시간에, 배신자가 있음을 알리셨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우리 중에서 누가 큰 자 인가 하는 다툼을 일으킨 것이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남들에게 “랍비”나 “아버지”라고 칭함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사받는 것을 즐기고 있다고 하신다. 21.그들은 일부러 눈에 띄는 옷을 입고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대우를 받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다. 잔치를 가도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모습을 보고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다. 22.예수님은 제자들이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 때문에 괴로우셨다. 자신의 길은 고난의 길인데, 제자들은 자기들만의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자고 하였고(15)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분위기를 피하여 산으로 가셨다. 23.그리고 흥분한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큰 파도를 만나고서 정신이 든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셨지만, 본질상 제자들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부족한 사람들을 지도자로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은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거룩한 말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는 도움을 주지도 않고 남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것을 지적하신다. 24.그들이 하는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에 치중되었다. 사실, 좋은 일을 하거나 깊이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 안 보이니 잘 모르면서 함부로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종교지도자의 기본은 말씀을 연구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25.사람이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본을 보이고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아주 졸은 경우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은 참으로 좋게 하지만 그렇다면 당신이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할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26.예수님은 말로는 엄청나게 “자기 의”를 주장하고 거룩한 척 하지만, 행동으로는 덕이 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셨고, 이런 행태가 다른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 마저 막고 있는 행위임을 알게 하신다. 27.이들은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못 들어가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13).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는 말 중에 옳은 것은 따로 떼어내서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지도자에게 기분이 상하면, 그가 하는 모든 말에 귀를 닫아 버린다. 혹은 왜곡해서 듣는다. 28.이런 수준의 사람을 미숙한 사람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같은 물을 먹고서 젖소는 아기들이 먹는 우유를 만들고, 독사는 사람을 죽이는 독을 만든다. 똑 같은 대상에게서 듣지만, 자신이 좋은 것을 흡수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군대에서 공수훈련을 받는데, 훈련생들은 모두 교관들을 미워했다. 29.믿기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힘들게 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관들을 향해서 밖에서 보면 뒤통수 조심하라고 뒤에서 작은 소리로 불만을 흘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훈련을 잘 받아야 낙하할 때, 내가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교관들의 지시에 따랐다. 30.예수님은 3절에 보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고하신다. 즉, 바리새인들이 본이 되지 않는 모습이 있다고 그들이 전한 말씀을 다 무위로 돌리지 말고, 너는 너의 신앙을 지켜 나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가 사람에게 영향받아서 그 신앙이 무너지지 않고 말씀은 말씀대로 지키고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31.우리가 어떤 말씀을 지도자와 연관해서 생각하다가 그 지도자가 무너지면 내 안의 말씀과 신앙적인 의지도 다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1-12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생겼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들을 기준으로 파가 나뉘어 갈등하였던 것이다. /32.초대교회는 시절에 우리가 아는 대단한 핍박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순교한 것은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순교를 일종의 은사로 생각하게 되었다. 즉 받을 수 있는 사람만 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교지도자들 중에서도 핍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는 일들이 생겼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어서 기독교가 인정받게 되었다. 33.그러자 배교한 사람들이 과거에 베푼 세례는 무효라고 하면서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도나투스 주의자”들이 있었다. 세례를 근거로 과격한 운동을 하는 일은 이후에도 16세기에 독일 “뮌스터”에서 재세례파를 중심으로 있었다. 이렇게 초대교회가 혼란스러워지다 보니, 당시의 유력한 교회 지도자이며 신학자로 오늘까지 유명한 “어거스틴”이 정리를 하였다. 34.어떤 이가 세례를 받을 때, 세례를 베푸는 이는 사람이지만, 그 세례를 이루어지게 하시고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세례를 베푼 이가 이후에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베풀어진 세례는 그 자체로 유효하다. 이렇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 그 이후에 잘못되었다고 이전에 베푼 세례가 그 사람과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이 설명되어진 것이다. 35.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은 말씀 그대로 구별해서 듣는 능력이 있어야 우리에게 좋은 것들을 계속 공급하는 지혜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신용을 가지고 본을 보이는 것이 최선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바리새인들의, 그리고 제자들의 연약함과 인간적인 욕심을 보셨다. 그래서 제자들이 대우받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36.예수님은 본문 12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이나 제자들이나 아니 인간은 누구든 높은 자리에서 우쭐거리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다섯 살 짜리 유치원생도 자기 집에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90이 넘은 할머니도 친구들에게 손주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지 자랑한다. 37.그러면서 자기가 우월하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늘 유지되거나 늘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만 팔리면 인간은 쉽게 좌절감을 느끼거나 허무함을 느끼면서 구원의 길로 힘차게 걸어갈 동력을 상실하기도 한다. 38.자기가 원하는 우쭐거림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분노하거나 불평이 드는 경우가 있을 것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한 것이 신앙생활을 제일 잘 하는 것이다. 현장에서 사람들과 상황에 부딪히면서 자존심도 상하고 내 맘에 불편함이 생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바란다(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9.비록 무시 당했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자존심이 상하는 시간이 있고 심지어는 오해 때문에 수치스러운 상황에 빠졌다고 화가 나는 경우가 있을 때, 조급한 마음에 은혜롭지 않는 결정을 짓는 미숙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13에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40.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고, 그 다음 단계로 넘어서 올라가는 진정한 제자도를 따르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말씀은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분별력이 있는 성도,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마음의 시험을 이기고 주님만 따라가는 순전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