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16 잠언 24:1-12 ”지혜를 가지고 이기는 자”(박성일 목사)
1.많은 환자들을 다룬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암이나 우울증에 걸린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그 전에 벌써 세상을 떠났기에 그런 줄 몰랐지만, 사람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이런 것들이 생긴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2.한국의 경우에는 의료환경이 좋아지고, 이것을 동경해서 역이민 하는 사람들도 근래에 있지만, 죽기 전에 고통스러운 시간은 미국 사람들보다 두배나 길다(평균 10년)고 한다. 즉 수명은 늘어난 것 같은데, 삶의 질은 고통의 연속인 것이다. 3./어떤 분이 암환자 병동에 오래 있어서 많은 사람과 이야기해보았는데, 당연히 암환자들의 관심은 자신들의 병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말 자기 건강에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은 사람도 거기에 와 있고, 정말로 세세하게 신경을 쓰면서 자기 건강을 관리한 사람도 거기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4.그런데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잠을 늦게 자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 화를 삭이기 위해서 밤새 다른 것을 하는 삶은 실상은 자기의 몸을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사회환경이 바뀌면서 각자는 자기 삶의 도전을 죽을 때까지 감당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5.오늘 나이가 90이 된 노인도 그 나이에 처한 삶을 처음 살아 보기 때문에 또 나름대로의 도전과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시편 90편은 모세가 지은 것인데,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늦게 활동하다가 12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오히려 그에게는 노년에 커다란 도전이 왔다. 6.모세는 하나님에게 지혜로운 마음 얻기를 간구하며(12), 14절에 보니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한다. 7.아침에 일어나사 지저귀는 새소리와 따듯한 햇빛을 보면서 하루를 숨쉬며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느끼며 만족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러한 영혼은 노년에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누구라도 자신은 그러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8.그러나 오히려 노년에 더 마음이 망가지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에 신경을 쓰는 만큼 우리 인생의 순간 순간에 자신의 영성을 잘 지켜내고 유지하고,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삶을 살아야 우리는 비참하지 않은 심령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심령이 바로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열매로서 읽혀지게 된다. 9./로마서 14장을 보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고 하며 11-1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록 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으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0.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죄는 숨겨질 수 없고 결국은 다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의 죄를 해결할 길을 열어주셨다. 11.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보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예수님의 은덕과 특혜를 입은 사람들이 그만큼의 생활을 하지 못하고 살다가, 심지어는 자기의 연약함과 성질 때문에 주어진 귀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12.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귀한 복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는 것이지, 전에는 잘하는 것 같았으나 중간에 자기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고 저지른 실수나 죄악으로 인하여 가장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복음과 은혜를 끝까지 지키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 13.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못된 기질들이 이것들을 방해한다. 즉 내 안에는 거룩한 예수님을 따르며 닮아가고자 하는 방향성도 있고, 또 정반대로 순간적으로 혈기나 정욕대로 하고 싶은 기질도 있다. 14.나는 전에 말은 참 거룩하게 해 놓고서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정 반대의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서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기가 뱉은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고 변덕을 부리는 것이 스스로의 신용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임은 자명하다. 15.결국 주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졌지만, 주어진 것을 잘 지키고 또 열매를 키우는 사람에게 최종적인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라는 복음을 잘 지키기 위하여 내가 어떠한 상태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문을 보면, 먼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도 하지 말라고 한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자기가 욕하고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다. 16.그리고 평상시에는 비난 하다가도 막상 그 사람과 친할 기회가 생기면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하게 된다. 그러니 그 말의 신용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눈에 끌리는 이익대로 달라붙는 사람이 전혀 지혜롭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되기에, 이것에서 마음을 멀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본문3-4절을 보면 지혜는 집을 건축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또 그 안에 있는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보석같이 채워진다고 한다. 지혜라는 것은 당연히 분별과 선택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꽤 똑똑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형편없는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곤 한다. 18.그러나 지혜는 우리의 살길을 찾게 하는 것이고 여기에 지식이 붙어야 그것이 온전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성경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살면서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발언하지 않는다. 신문 몇 줄 읽은 것으로 마치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그런데 성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철학이나 정서나 짧은 지식을 가지고 목회나 신앙에 대해서 이래 저래야 한다는 것을 종종 보았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유익이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을 곡해해서 해석하기도 한다. 20.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어떤 문제점을 찾아내고 마치 자기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것인냥 스스로를 세우지만, 이미 수 천년 전에 그러한 논의나 문제제기와 여기에 대한 응답은 있어왔다. 다만 자신이 그러한 역사를 모르고 있으니까 자기가 혼자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21.잠언에서의 지혜는 단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는 지능 같은 것이 아니다. 잠언에서는 지혜를 인격적으로 표현한다. 1:20 이하를 보면 지혜는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사람들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23절을 보면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한다. 22.그러므로 지혜는 성령님의 임재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성령님은 어두운 우리의 눈을 밝히시고 약해진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죄 된 마음을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지향하게 하고 이것을 지속하도록 붙들어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순간순간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지 의문에 차 있을 때, 우리에게 바른 길을 지도해 주시는 존재이다. 23.그리고 이렇게 마음 속에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자기의 감정과 욕망과 눈에 보이는 판단대로, 즉 믿음 없이 해버리려는 결정에 대해서 통제를 하게 되고 그렇게 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이끌어 주신다. 24.이 말을 반대로 하자면, 마음 속에 성령이 빠져나간 사람은 자기 감정이나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자기 판단대로 함부로 결정하거나 언행을 하게 되고 이제 그 뒷감당이 되지 않아서 미끄러져 버리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본문 5-6절을 보면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고 한다. 25.우리의 대적이 우리를 공격할 때에 이것을 그냥 감정적으로만 받는 사람은 당연히 망하게 된다. 이것은 주님이 피를 흘려 세우신 공로를 개인적으로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요, 당연히 신앙적으로 덕이 되지도 않고 주위 사람들의 사기마저 꺾는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26.이것에 대해서, “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들을 알게 뭐냐?”고 항변하겠지만, 그러한 태도는 분명히 성숙한 신앙인의 본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1차 세계 대전 때, 양편의 참호 사이에서, 서로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해서 수 많은 병사들이 밖으로 나와 뛰어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기관총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27.하루에 몇 만명 씩 사라지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적이 공격해 왔다가 돌아갈 때 당연히 데려가지 못한 부상병이 있기 마련이고, 이 부상병을 데리러 가면 또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그대로 놓게 된다. 그러면 부상당한 병사는 밤새도록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울어댄다. 28.그러면 그 소리를 밤새 듣는 아군의 사기도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 공동체에 힘을 보태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반대로 뭔가 하고자 하는 의지도 꺾게 만드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29.다음 장인 24:13을 보면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내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고 한다. 이렇게 모두가 갈증이 나고 어려울 때 시원하게 해 주는 이, 마치 갈렙이 다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서도 거인 족속 때문에 고민하는 여호수아에게 가서 자신이 맡겠다고 한 것처럼 즐거움과 용기를 주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요 충성된 사람인 것이다. 30.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없으면서도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입장을 합리화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의 부족함을 합리화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는 사람을 급속도록 미련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이 남의 탓을 하고 비난만 했더니 존경받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가? 31.그것은 자신이 나약하고 미련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본문 9절을 보면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련함, 약함, 두려움은 어려운 상황 속에 더욱더 우리의 심령속에 파고든다. 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고 한다. 32.고대의 전투를 보면 적군과 맞붙어서 방패로 막고 칼로 치며 커다란 선을(line)을 형성하고 싸운다. 그리고 전투에서 서로 밀리지 않기 위해서 뒤에서도 밀어주며 앞으로 밀고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게 싸울 때에는 별로 사망자가 생기지 않는다. 33.그러나 이제 그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서 등을 보이고 도망을 치게 되면, 그때 사망자의 70%가 발생한다. 즉 등을 보이고 약점을 노출할 때, 힘들어서 벗어나려고 했겠지만 오히려 죽음을 당하여 들짐승의 밥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대적도 우리가 언제 약점을 보이는지, 언제 낙담하는지를 보고 있다. 34.그래서 마치 죽기를 기다리는 동물 근처에서 쳐다보는 하이에나처럼 잡아먹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가 있어서 자기를 지키는 사람, 마음이 상하는 상황에서도 낙담을 넘어서는 사람에게는 이제 그 역량을 가지고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해 줄 것을 당부한다(11). 35.갈라디아서 6장을 보면 2절에는 “너희가 짐을 서로지라”고 한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하며 5절에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자기의 짐도 넉넉히 지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약한 사람의 짐도 도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36.애초에 자기 짐도 지고가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는 이가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자기에게 힘이 있는 사람이 약한 자를 돕는 것을 본문은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가 도울 수 있으면서 못 본 체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을 하신다고 한다. //아무튼,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신뢰하기 쉽기 때문에, 세상에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37.누가 봐도 죄인인 사람도 왜 죄를 지었냐고 하면 나름대로의 정의관을 내세운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토막살인한 살인범이 잡혔다. 경찰이 잡은 게 아니라 생각도 못한 경우를 통해서 잡히게 되었는데, 나는 그렇게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 적어도 주위의 압박 때문에라도, 사과의 말 한마디는 할까 했는데, 웬걸, 오히려 자기는 옹호하고 사회와 죽은 여자들을 탓하는 것이었다. /38.그런데 일반적으로, 얕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 자기를 옹호하고 합리화하는 태도는 그 지속력과 복원력의 깊이가 얕다. 성도도 의로움의 근원이 “예수”여야 다시 일어서고 버티는 것이지, “내가 뭘 한 사람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포장해 보았자,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감정이 상하고 무너지는 것으로 그 실력이 드러나게 된다.
39.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은, 그 안의 “의” 자체가 자기의 주장이나 합리화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려움마저 뚫고 가는 것과 결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견뎌내고 다시 일어선다. 그래서 본문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고 한다. 40.시편37편 24는 의인의 넘어짐에 대해서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마음에 충만한 사람, 그 충만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지혜가 되신 성령님이 혹독한 환경에서도 넘어지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다. 41.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 있어야 하는데, 누구라도 매일 같이 자신의 마음을 끌어내리는 공격을 당할 수 있다. 이것에게 계속 공격을 당하고만 있으면 어느 날은 무너지게 되고 우울증이나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시간만 길어지게 된다. 42.이런 일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도, 그리고 겨우 십대인 청소년에게도 누구에게나 벌어진다. 이것은 인생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남들이 보기에 성공했거나 잘 사는 사람에게도 가차 없이 해당된다. 이럴 때 자기 감정이 들이 붓는 생각과 판단을 따르게 된다면 이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43.물론 누구나 다 죽게 되지만,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이 아니라면 이것을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안에 부어진 지혜는 자기 감정과 혈기대로 끌고가는 인생에 그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구원을 주시는 길로 우리의 진로를 변경하게 하신다. 44.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예수라는 길로 가야 하는데, 현실에서 생긴 수많은 상한 감정의 폭발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45.게다가 여기에는 현실에서 생긴 낙담과 수많은 자신만의 그럴듯한 명분과 합리화가 사람의 머리를 꽉 채우게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가치 있고 의미 있고 힘 있게 만드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짐은 당연히 넉넉히 지고 갈 수 있고, 약한 자를 권면할 정도의 능력과 본이 되며, 혹시 그 와중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만한 회복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6.뉴질랜드에 이민목회를 와서 처음에 어려움을 겪은 한 후배가 아내가 싸우는 모습을 딸에게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딸에게 커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커서 결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래도 결혼이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싸우는 때도 있지만 좋은 때도 있어서 괜찮아”라고 했다는 것이다. 47.우리 안의 약함과 미련함은 한번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배가해서 그것만이 다라고 생각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찢어지게 하고 결국 사망으로 가게 하지만, 어려움 가운데서도 소망을 보게 하고, 주님의 영광을 지향하여 가게 하는 지혜는 우리가 결국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께 인생의 날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과 빛을 준다. 48.자기의 감정과 눈 앞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 성령으로 다시 일어서는 소망 있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더욱더 주님의 영을 받고 말씀으로 그 내실을 채우는 가운데,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어려운 시간에는 주님의 붙드심을 경험하고 넘어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