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9 마가복음 6:1-6”예수님의 고향에서 생긴 일”(박성일목사)
1.10년 전에 뉴스를 보니, 중동에서 ISIS(이슬람 국가)가 말도 안되는 잔인한 짓을 벌이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17살이던 아들이 군대에 가게 되었다. 나는 내 아들이라도 저런 나쁜 놈들을 응징하는 군인이 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대에 대해서 마음이 열려 있었다. 아무튼 16주 정도 훈련을 받은 아들이 훈련소를 퇴소한다고 해서 조지아 주에 있는 육군 보병 훈련소에 갔다. 2.처음에는 “뭐 겨우 보병 훈련소 퇴소식 쯤이야” 하고 생각했는데, 또 나름 아들이 새벽에 군복을 입고 열을 맞추어 오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이후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동안 수고한 것에 대해서 치하하며 군생활에 대해서 물었다. 3.아들은 자기네 기수가 200명인데 한 방에서 생활했고, 자기가 제일 어리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200명이 한 공간에서 생활을 하고 훈련을 받고 근무를 서다 보니,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의 짝은 너무나 이상한 사람이라서, 이 사람이 왜 군대에 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4.그럼에도 군대에서 무엇을 배웠냐고 물었더니 자신의 일상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사생활이 지켜지는 작은 방이 너무나도 귀중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은 고생을 해보아야 철이 드는 것이고, 철이 든다는 것은 자신의 주변의 것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여기서 더 성숙한 사람은 이제 일상에서 감사의 표현을 반복한다. 5.그리고 그렇게 감사와 소중한 마음으로 일상을 대하는 사람은 노년에도 주변의 존경과 사랑을 얻게 된다.
어떤 남편은 아내의 가사노동 하나하나에 점수를 매긴다. 오늘 청소는 몇 점이고, 오늘 식사는 몇 점이고, 오늘 서비스는 어떠했고…….그러니 아내의 마음에 즐거움이 있겠는가? 아마도 남편이 이렇게 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나 과거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하지만, 어떤 경우를 보니 아예 그렇게 기질이 타고난 사람도 있다. 6.내가 전에 있던 교회에 겨우 7살짜리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부모님은 두 분다 수더분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아이는 자꾸 남들을 평가하고 비교하고 다니면서 독설을 쏟고 다니는 것이었다. 한번은 남선교회원들과 교회 근처에 낚시를 갔는데, 자기 아빠가 큰 물고기를 낚았고, 다른 친구의 아빠는 아직 고기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빈 통을 향하여 자기 아빠는 세 마리 잡았고 너희 아빠는 한 마리도 못 잡았다는 것을 조롱하기 위한 것인지 “3대 빵(zero), 3대 빵” 하고 소리지르며 상대를 무안주는 것이었다. 7.당연히 친구 아빠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사람이 자꾸 주변과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이 어린 시절에 있었던 아픈 일에 대한 보상심리인줄 알았는데, 아예 기질적으로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 아이의 아빠가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난다 “아니 얘는 왜 이런지 몰라.” /8.그런데 이런 태도가 선천적이든지 아니면 자라면서 생겼든지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주장하는 판단보다 더 위에 두어야 할 분이 있으니 바로 예수님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나의 이러한 판단과 감정과 주장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이 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진정성을 나타낼 수 있다.
9.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이적을 일으키신 가운데, 지명도가 높아지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상태로 자신의 고향에 들어오셨다. 바로 전에 있었던 이적들을 보면, 4:35-41을 보니 큰 광풍이 불어서 배가 뒤집히려고 하였으나 예수님이 이 광풍을 잠잠하게 다스리셨다. 그리고 또 이어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에게서 수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10.이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얼마나 통제하기 어려웠는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제어하려고 쇠사슬과 고랑으로 몸을 묶었으나 여러 번 이것을 끊었다고 한다. 그러니 초자연적인 힘으로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면 불편한 마음이 있지 않겠는가? 11.그런데 실상은 자기 자신도 괴로운 것이었다. 5:5을 보면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고 한다. 그러니 그 안에 들어간 악한 영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망치고, 그 사람 자체도 망가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사람이지만,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동정심을 얻기는 커녕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12.그런 그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그 안에 수많은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그리고 이 과정에 사람들은 겁을 먹고 예수님이 그 지방을 떠나기를 간구하지만 도리어 해방을 입은 사람은 배에 타려는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한다. 여기에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예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행하신 일을 알리라고 한다. 13.20절에 보면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는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12년을 아래로 피를 흘리면서 고통 당한 여인을 자유롭게 해 주신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집에 가는 길이셨는데, 그의 열 두 살된 딸이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14.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자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끄시는 동안 그 딸이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통곡해대는 가운데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번역하면 내가 네가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하시고 아이를 일으키신다.
그러니 대단한 이적을 일으킨 예수님이 고향으로 들어왔을 때, 그 소문도 같이 들어온 것이고, 또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러니 상당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서 나사렛에 들어간 것이다. 15.그리고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놀라서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6:2)고 수근거린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는 그런 예수님이 고깝지 않다(uncomfortable)는 것이었다. 16.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의 예수를 알고, 또 그 집안을 알면서 자기보다 아래라고 내려다 보았는데, 지금은 세력을 힘입고 인기도 좋아진데다 또 생각지도 않게 가르치는 것도 잘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에 불편함이 생겨났던 것이다. /예수님이 고향을 방문하신 평행본문들을 찾아보면 마태복음 13:57에는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한다. 17.누가복음 4:28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난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라신 동네에서 예수님은 아주 험한 일을 당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불편한 말과 행동을 하는 그 심리적 바탕에 대해서 본문 3절은 이렇게 적고 있다 18.“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이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 한지라.” /우리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서 나셨다고 신앙고백을 하지만, 그러한 믿음이 없었던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비를 알지 못하는 사생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19.그래서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호칭한다. 그러니 아예 부르는 호칭자체로 예수님을 깎아내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은 다 우리와 같이 지내는데, 예수님만 어떻게 다를 수 있냐는 질투심이 그들의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0.이렇게 같은 동네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 나오자 사람들이 기뻐하기 보다는 질투하고 흠집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은 4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을 하셨고, 중요한 것은 정작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한다. 21.얼마 전에 죽은 사람도 일으켜 세우고, 엄청난 귀신을 쫓고, 많은 환자를 고치신 예수님이 정작 마음이 막혀버린 고향 사람들에게는 그 능력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상태에 따라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반대로 부으시려던 축복의 자루를 그냥 들고 지나가시게 할 수도 있다.
22.한 사형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의 형은 모두가 인정하는 대단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호소로 인하여 주지사는 사면장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 사면장을 그 사형수에게 직접 보여주고 형을 중지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형수를 찾아가서 “만약에 당신이 사형이 중지되고 자유의 몸이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물었다. 23.그러자 이 사람은 눈에 살기가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나를 신고한 그 놈을 쏘아 죽이고, 그 다음에는 나에게 사형을 판결한 판사를 찾아가서 쏴 죽이겠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주지사는 그냥 왔던 길로 돌아갔다. 사면장은 그의 주머니에 그대로 있었고 실행되지 않았다. /24.어떤 사람은 주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능력도 전심으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 문이 닫혔던 것은” 예수는 나보다 집안도 좋지 않은데, 예수는 나보다 사회적으로 아래에 있던 사람인데, 그런데 이제 내가 그런 예수에게 어떻게 잘해줘”하는 얄팍한 자존심과 시기심이 있었던 것이다.
25.이런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자고등학교 동창 중에 학교 다닐 때에 나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가 결혼을 잘해서 나보다 더 잘 살 수 있다. 갑자기 SNS를 통해서 혹은 다른 친구의 입을 통해서 이런 소식을 들으면 갑자기 배가 아파지고 잠이 오지 않는다. 배가 고픈 것은 참겠는데, 배가 아픈 것은 못 참겠다. 26.그리고 이런 심리의 기반에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것들을 가볍게 여기면서 소중히 대할 줄 모르는 마음과 연동이 되어진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대하는 것들은 우습게 여기고 어디 멀리 있을 것 같은 완벽하고 환상적인 조직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동경하는 마음과 시기심을 가진다. 27.어떤 사람은 TV에 나오는 멋진 외모의 배우와 아내를 비교하면서 늘 구박하고, 나도 저렇게 멋진 여자와 살아보았으면 좋겠다고 환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보지는 못한 채, 짧은 정보를 가지고 멀리 있는 다른 대상을 왜곡해서 선망하고, 정작 자기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28.그러나 현실을 도피해서 도망간 곳에 낙원은 없다.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바탕 위에서 역사하신다. 마태복음 13:58을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 5절은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한다. 29.그러니 자의든 아니든 그곳에서는 예수님의 능력과 혜택이 정작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흘러가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자존심과 가문의 명예를 최고로 생각하는 두 양반 집안이 있었다. 이 집안 사람들은 툭하면 부딪히면서 자기 집안이 더 대단하다고 내세우며 상대편을 어떻게 해서든 흠집을 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양쪽 집안의 딸이 한 날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30.그렇게 신부들이 가마에 타고 신랑집으로 가다가 좁은 산길에서 마주쳤다. 당연히 상대편보고 먼저 빠지라고 소리를 쳤다. 물론 아무도 양보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양쪽 집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상대편에게 먼저 비키라고 주장하였다. 그렇게 한달이 지났다. 양쪽 집안 사람들은 모두 지쳤다. 그러나 먼저 양보를 할 수는 없었다. 31.신부들도 가마 안에서 거의 죽을 맛이었다. 결국 양쪽의 대표는 만나서 이렇게 서로 안 비킨다고 하니, 방법은 아예 신부가 없어지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지 않냐는 말에 합의가 되었다. 결국 어린 신부들은 치마를 뒤집어쓰고 절벽 아래 강으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오늘날도 어느 지역에서는 작은 자존심 하나에 흠집이 났다고 실제로 여동생이나 딸이나 아내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진다. 32.이것을 명예 살인이라고 하는데, 자신의 집안의 명예를 더럽히는 여자는 죽여도 된다는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아직도 있는 것이다. 인도에는 “사티”라는 전통이 20세기말까지 있었는데, 이것은 남편이 죽으면 살아 있는 아내도 같이 태워 버리는 것이다.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33.자기나 집안의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다 보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깎아내리고, 그렇게 자신이 더 우월함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이 눈앞에 예수를 보고도 능력을 얻지 못했다. “내가 예수를 어렸을 때부터 아는데, 예수가 우리 집을 수리했는데, 내가 부렸던 사람이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그건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다.”
34.//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기는 하지만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해 버리거나 심지어는 잘 듣지도 않는다. 자기 맘에 무언가 불편한 것을 품고 말씀을 들으면 당연히 자기에게도 은혜가 되지 않고 능력이 자기의 것이 되지 못한다. 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능력을 받아야 하지만,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에도 상당한 능력과 수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아왔다. 35.자기 안에 무지와 원망과 근심과 시기심과 섭섭함을 가득 채운 채로, 능력 있게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서 능력을 채우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청소해야 한다. 청소의 시작은 방해가 되는 것들을 먼저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36.근심이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존심이나 아집 그리고 주님에게 자기의 주권을 절대로 못 내놓겠다는 불순종. 결국 이러한 것들이 내 안에 주님의 역사와 능력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다(마태복음 9:17). /37.자신의 일상에서 주님이 임재하시는 것을 느낄 정도로 감사와 겸손의 마음을 가진 자에게 주님은 능력을 주시고 이길 힘을 주신다. 그런 힘을 얻을 때, 비록 나의 상황이 완벽하고 환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 곳에서도 천국을 누리게 된다. 38.예수님은 마태복음 12:28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즉 자신의 부족하고 병든 마음과 상태를 이기는 것 없이는 우리는 온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찬송가 461에 가사를 인용하겠다 39.“걱정 근심 어둔 그늘 너를 둘러 덮을 때, 주께 네 영 맡기겠나 최후 승리 믿으며. 이런 일 다 할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용감한 자 바울처럼 선뜻 대답하리라,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라.” 40.우리는 자기의 불편한 감정 때문에 눈 앞에 예수를 놓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말씀에 주권을 드리고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는 천국을 누리는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라옵기는 일상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사는 가운데 주님의 능력을 충만하게 채우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