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8 “거듭나야 보이는 하나님 나라”
2024.7.21. 주일 설교 본문(박성일 목사)
1.사람에게는 “기질”이라는 것이 있다. 오늘날 교육계에서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주장과, 이것은 환경에 의해서 바뀌어 질 수 있는 것이며 이런 흐름은 평생 지속된다는 주장이 맞선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신학과 동기가 120명이었다. 그 중에는 나이가 많아서 먼저 목회를 나간 동기들이 있었다. 2.그리고 이제 나도 졸업반이 되어서 목회를 나갈 것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기들이 사용하는 인터넷 모임에 먼저 목회를 나간 형이 적은 글이 기억난다. 그것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 너무 기대하다가 실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 형이 “현장에 처음 나가서 무척 실망한 일들이 많았구나”라고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3.나는 뉴욕에 살 때 현대 미술관에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관에 몇 번 갔는데, 고흐의 그림이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이유는 그의 그림에 대단한 집념과 의지가 담겨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자화상을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얼굴을 칠할 때 전혀 사용하지 않는 파랑색, 노랑색 물감들을 잔뜩 발랐다. 어떤 이는 그가 다양한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4.아무튼 고흐는 원래 신학교를 나와서 전도사의 몸으로 광산지역에 들어갔다. 그때 그린 그림이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흐는 자신이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변화되고, 내가 그들에게 열정적으로 대하면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인정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처럼 순진하지 않았다. 고흐는 마치 예수처럼 살고 싶었으나, 어느 순간 자기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사람들이 자기의 메시지에 크게 변화되지도 않는다는 좌절을 느꼈다. 5.그러한 좌절 속에 그는 그곳을 떠났고, 자기를 가르쳤던 교수님과 상의한 결과, 목회를 접고 그림을 그리기로 하였다. 그러니 그의 그림 속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자기가 기대했던 것에 대한 좌절과 안타까움이 오히려 더 심한 집착과 몰두로 변하여 마치 미친 사람의 것과 같은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흐의 일생을 알고 있던 나는 어느 순간 고흐의 자화상을 보는데 울컥하였다. 오래 전에 “Don McLean”이라는 가수가 부른 “Vincent”라는 노래도 돌이켜 보면, 자신의 광기와 절망감을 보면서도, 그럼에도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싸우고 괴로워했던 고흐의 정신세계를 그리고 있다. 6.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남편은 버릇이 이상해서 직장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현관부터 목욕탕까지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으며 움직인다. 그러니 아내가 남편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다니며 옷을 주워야 했다. 당연히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 그 버릇은 바뀌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아이가 밤새도록 게임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은 부모들은 전 세계에 수억은 있을 것이다.
7.그래서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게임해서 그렇다고 그러고, 힘들다고 그러면 게임해서 그렇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넣어주어서 아이가 게임을 덜 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게임해서 눈 나빠진다고 했더니, 게임을 멈춘 아이를 본적이 있는가? 사람은 잔소리 해서 바꾸기 어렵다. 그런데 자각하면 변할 수 있다. 즉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의 엔진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8.그리고 이렇게 자각을 얻는 대부분의 경우는 부정적인 잔소리나 압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은 모습을 보일 때, 매력을 느끼면서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품이 넓은 믿음을 보이고 자기를 이기는 멋진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기도 자기 분노와 갑갑함을 이기지 못해서 남의 흉만 보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는가? /9.많은 사람들이 “신데델라”, “캔디” 같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놀랍지 않은가? 신데렐라와 한국의 “콩쥐 팥쥐”를 보면 스토리 구성이 거의 같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전세계에 5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 문화는 다르지만, 어려운 환경에 있던 사람이 그 어려움을 강한 의지로 참고 이겨내며 마침내 좋은 날을 본다는 것은 모두가 바라는 바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영화나 드라마도 여전히 이러한 구성을 가져다 쓴다. 그래서 외로워도 슬퍼도 울기보다는 넓은 들로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남들은 울거나 부정적인 말만 할 때, 일어나서 한번 잘 해보자라고 하는 사람이 바로 남다른 사람이요, 이러한 모습이 귀감이 되는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이다. 10.자기 기질이 약하고 불안한 사람의 경우에는 자기 성격만으로 온전히 설 수 없지만, 하나님께 붙들림을 당한다면 변할 수 있고, 이것은 나이와도 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의지의 문제요, 변화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요 축복된 사람이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 중에 하나인 “니고데모”가 있었다. 그는 백성의 지도자였다. 그는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사람들은 지도자인 그가 예수를 밝을 때 찾아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염려 되어 밤에 찾아 왔다고 생각한다. 한장을 넘겨보면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볼 수 있는데, 이 여자도 남들의 눈을 의식하여 일부러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다. 이것을 보면 지위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은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11.니고데모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줄 안다고 한다. 그가 예수님을 부른 명칭조차 “랍비”(선생)이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가 행하시는 표적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인 큰 깨달음을 얻으려고 한다. 아마 특이한 방법이나 비밀을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12./내가 신학교 2학년 때, 당시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부흥회로 유명한 목사님이 채플시간에 설교를 하러 오셨다. 미리 광고가 나 있었기에, 나는 목회에 대한 뭔가 놀랍고 대단한 기술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분은 몹시 실망스러운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목사는 성경 많이 보고 기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내용은 아버지한테 많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밥 맛있게 먹으면 배부르다와 같은 소리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목회를 하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어떤 테크닉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것임을 알았다. 예수님은 영생을 추구하는 니고데모에게 놀라운 테크닉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인격 자체를 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13.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로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고 하신다. 다시 태어나다니?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갈 수도 없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하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로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들어 갈 수 없느니라((5)”고 하신다. 즉 예수님은 육과 영을 분리하여, 영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14.아기가 여자 뱃속에 생겼을 때, 남편은 아내를 따라서 초음파실에 들어간다. 그러면 흑백화면으로 알아보기 힘든 영상이 뜨면서 의사가 아이의 상태와 신체의 발달 정도를 설명한다. 아니 꼭 산부인과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초음파를 찍으러 가서 검사자가 인체의 각 부위를 이야기 하며, 이렇다 저렇다고 설명을 해 주어도,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지, 솔직히 화면만 봐서는 뭔가 뭔지 하나도 모른다. 아마 검사하는 사람이 실제와 다른 말을 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15.똑 같은 그림을 보면서 누구는 건강한 신체나 병든 곳이 보이고, 누구는 아무것도 안보인다. 차이는 하나이다. 보이는 사람은 보도록 연습하고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로 “Train”은 기차라는 뜻도 있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훈련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옛날에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기관차에 상당한 양의 물과 석탄을 보급해야 했다. 16.기차가 중간중간 멈추는 곳에서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더워서 힘들다는 생각이 들든, 석탄과 물을 기차에 옮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기차는 훈련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성도도 하나님 안에서 훈련을 받아야 눈이 뜨이게 된다.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자기 감정이나 주장대로 하지 않고, 이미 이 길을 잘 알고 있는 선임자가 디자인한 방법에 자기를 맞추는 것이다. 17.물론 처음에는 힘들다는 생각만 들겠지만, 이것이 익숙해 지면,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길이 보인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되고, 이 자신감은 마음 속의 불안을 몰아내고 용기를 더욱더 내 안에 채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감도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소진된다. 18.많은 선교사들은 선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선교지에 갔다가 영악한 현지인들에게 급격히 정이 떨어져 버리는 경험하게 되는데, 마치 기차가 계속해서 석탄과 물을 채워 넣듯이 자신 안에 하나님의 영을 풍성하게 공급해야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간에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이유야 누구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을 넘어설 힘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영성을 충분히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석탄과 물 떨어진 기차처럼 서게 되는 것이다. 19.그리고 이렇게 멈춰서서 녹이 스는 엔진을 다시 돌리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내가 동부에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은 겨울의 평일에 난방을 돌리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교회의 난방기를 꺼버렸다. 그러면 수도관이 얼어서 깨지게 되니, 난방비보다 수십백의 돈을 지출해야 한다. 결코 영성의 엔진을 꺼뜨려서는 안된다. 세게 돌리지 않더라도 꾸준하게 돌려 주어야 한다. 20.이렇게 자신의 영성의 엔진이 살아 있어야, 훈련을 감당할 수 있고, 훈련을 겪고 나서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평상시에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던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할 수 있는 것이지, 평상시에 한번도 지향을 하지 않다가 갈 때 되어서야 천국에 가기 원한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받아 들이실지 나는 알 수 없다. 물로 거듭나는 세례는 자신의 과거의 사람이 죽고, 사람이 어머니의 양수에서 나오듯이 물에서 다시 나와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공식적인 선포이다. 21.그래서 세례를 의지적으로 받겠다는 것은, 이제는 다르게 살고 싶다는 결단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물로 세례를 받았었다. 그런데 이들은 새롭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지만 아직 그 안에 성령의 충만함이 없었다. 그래서 어떠한 일을 보면서 신앙의 눈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아직도 과거의 육신적인 눈과 인식으로 판단하였다. 그런데 아둔하고 겁 많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임한 성령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된다. 22.전에는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몰랐는데, 성령이 충만하니 이해가 되었고, 전에는 두려움과 염려에 잡혀 있던 마음이 이제는 용기를 얻고, 소망을 바라보게 되었다. 영적인 지각도 열리고 신앙인격도 변화가 된 것이다. 이것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요, 이렇게 기본적인 세례를 받고 또한 그 다음 단계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3.물론 성령은 자신의 주권을 가지신 존재이고 이것은 8절에 설명이 되어 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임재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영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에 스스로를 내어 놓아야 한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낡고 고집세고 자기의 아집에 잡힌 스스로를 죽여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을 하고 나면 오히려 스스로의 자랑이 된다. 24.그래서 고린도 전서 15:3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완전히 제거하고 과거의 부정적인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면 좋겠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박힌 기질과 아픈 기억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25./로마서 12:1을 보면 거룩한 영적 예배에 대해서 말하며 2절에 보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교회의 지도자들도 본을 보여야 하고, 성도들도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해서 반드시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제 예루살렘에 완전히 멸망하기 이전에 잡혀간 포로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는데, 당시는 선지자가 자신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기를 압박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것에 보조를 맞춘 선지자도 있었다. 26.그래서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에스겔 14:10에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 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당당하리니”라고 한다. 사람이 자신의 영성을 발전시키고 도전을 받아 들이는 것은 소수에게만 부여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구경만 하면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자기의 삶을 돌아보니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며 말씀으로 충만하며 신앙의 선한 본을 보인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도전은 언제라도 받아져야 한다. 27.이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으로 본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같은 장 16절을 읽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애초에 불안도 많고 의심도 많고 분노도 많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나약하다. 어떤 사람은 평생 남탓만 하고 남을 비난한다. 28./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스스로를 냉정하게 보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양심은 우리의 그럴듯한 합리화와 거짓말을 꿰뚫어 보신다. 한번 사는 인생, 주어진 기질이 있지만, 예수 피를 의지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도전을 받아 들여야 그 인생이 가치 있고 의미있지 않겠는가? 29.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마음으로는 인정하면서도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는 19:39을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버림 받으셨을 때, 용기를 내어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다. 그는 거듭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행동을 과감히 했던 것이다. 주님을 위해서 용기를 내고 주님을 위해서 도전을 하는 성도는 주님의 사랑과 인정하심을 받을 것이다.
30.바라옵기는 한번 사는 인생인데 자신에게 주어진 과거와 기질에 메여 살다 그 틀에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 안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