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1:8-21 “하나님을 위해 손해를 감수한 자”
(2024년 9월 22일 주일설교 박성일 목사)
1.다니엘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소년이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여호야김을 왕위에 앉힌 사람은 애굽의 왕이었다. 그러니 바밸론이 자기네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 나라가 겪었던 사건을 기억나게 한다. 2.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이미 “명나라”를 의지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한번 전란이 쓸고 간 뒤였다. 그럼에도 새로 일어난 청나라에 배타적인 반응을 보이니, 청나라는 조선으로 쳐들어 와서 조선의 왕을 잡고자 하였고, “남한산성”에서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던 조선의 왕은 지금의 “잠실”로 이동하여,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부딪히며 사죄하였고 세자와 수십만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3.나는 남한산성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산 반대편 도로와는 다르게, 내가 군생활을 했던 부대에서는 가파른 면을 타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비무장도 아니고 군장을 지고 올라가야 했고, 천리행군을 마치고 돌아오는 코스이기도 하였다. 4.또한 부목사 생활을 하였던 홍제동에는 “홍제천”이라는 하천이 있었는데, 이곳은 포로로 잡혀갔던 여성들이 치욕을 당하였기에 돌아오면서 그 몸을 씻었던 곳이다. 물론 돌아온 대부분의 여자들은 집에서도 배척을 받았고 “환향녀”라는 욕설을 듣고 살았고 이들이 중국에서 낳은 아이들을 “호로자식”이라고 불렀다. 이 말들은 현재까지도 욕설로서 사용되고 있다. 5.이런 설명을 하는 것은 다니엘서의 분위기와 흐름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느 날 바벨론의 군사가 성을 포위하였고, 아마 이들이 오기 전에 전쟁에 대한 공포와 소문이 먼저 도착하였을 것이다. 다니엘은 괜찮은 집안의 자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패전의 결과로 포로로 끌려간다. 바벨론 이전의 제국이었던 “앗수르”는 자기네 백성을 현지 사람과 결혼시키는 혼혈정책을 사용하였고, 이것은 이후에 유다와 사마리아가 갈등하는 이유가 되었다. 6.과거에 “코르테스”가 멕시코를 점령하려 했을 때, “말린체”라는 원주민 여자가 코르테스의 아이를 낳았고 이 아이들이 현재 중남미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종인 “메스티조”의 조상이 된다. 그렇기에 현재 멕시코에는 원주민과 원주민 혈통과 백인의 피가 섞인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바벨론은 자기네가 점령한 나라에서 쓸만한 사람들을 본국으로 끌고 갔다. 다니엘서를 자세히 보면 당시에 사용되던 언어 또한 다양한 국제적인 세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7.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정말 엄청난 고통과 어려움에 빠진 한 소년이 그 가운데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겼는지에 대한 것이다. 당시에 왕궁에서는 용모도 좋고 머리도 영특한 소년들을 길러냈다. 이런 엘리트들을 통해 자신들의 통치를 이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8.그래서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인재들을 길러냈는데, 당연히 여러나라의 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네 명의 유대 소년이 소개되는데, 이들이 바로 “하냐냐”, “미사엘”, “아사랴” 그리고 “다니엘”이었다. 물론 다니엘이 가장 인지도가 높지만, 다른 세 친구 또한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할 때에 엎드리지 않았다. 이것은 이들을 풀무불에 집어넣는 형벌을 당하게 하였으며 하나님은 이들을 건지셨다. 다니엘 또한 사자 굴에 던져 졌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9.그런데 이들은 이미 전쟁과 포로생활을 통하여 자신들이 가진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사람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그것을 빼앗길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마음이 약해지지만, 이미 한번 잃어버리면 그 다음에는 담대함이 생긴다. 그래서 역시 포로민의 자손이었던 “에스더”는 여자의 몸으로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고백을 하고 용감하게 나아갔다. /10.우리가 상실을 통하여 아픔을 겪으면서 한가지를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세상이 내 계획이나 의지대로 조종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누리는 것 또한 내 실력과 생각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1.“욥”은 고난을 겪으면서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린 나이에 혹독한 세상을 겪으면서 이러한 신앙을 체득하게 되었다. 물론 과거를 돌이켜 보며 현재를 보면 속쓰린 생각이 들겠지만, 그러나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죄악을 저질렀고, 그 죄악을 회개하지 않았기에 그 값을 치루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인내하였다. 12.다니엘서는 12장으로 이루어졌 있는데, 1-6장까지는 읽기 쉽지만, 그 이후로는 상당히 난해한 예언들을 담고 있어서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다니엘이 세상적으로 성공한 것을 주로 생각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수준 높은 영적인 교감까지 이룬 신앙의 사람이었다. 13.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은 어떠한 기초와 뿌리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바벨론에 있으면서 당연히 왕궁에서는 우상에게 바쳐지는 음식들이 나오기 마련이었고, 술도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 다니엘은 본장 8절에 보면 뜻을 정하여 음식과 술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14.이러한 다니엘의 태도에 대해서 성경은 9절에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고 한다. 즉 담당자가 어렵게 하면 힘들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담당자의 마음에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환관장의 지시를 받아 자신들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자신들은 물과 채식만 하겠다고 한다. 15.열흘을 그렇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처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이들의 얼굴은 오히려 다른 소년들보다 좋아졌고, 자신의 신앙의 양심을 거스리며 사는 것보다 도리어 마음의 평안과 정직을 얻는 것이 그들의 육체를 더 윤택하게 하였다. 16.그러나 이들의 몸만 좋아진 것이 아니라, 17절을 보니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고 한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눈 앞의 손해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하나님은 이들이 요청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지혜를 주셔서 이들의 앞길을 도우신 것이다. 특히 2장을 보면 무서운 꿈을 꾼 느브갓네셀 왕이 자신의 꿈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꿈의 내용까지 말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한다. 17.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는가? 내용을 들어야 이렇게 저렇게 꿈보다 좋은 해몽을 해서 마음을 살 수 있는데, 이미 노련해진 왕은 도리어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을 불신하고 죽이려고 하였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그 명단에 올랐다. 그런데 이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매, 하나님은 심지어 꿈의 내용까지 보여주셨다. 그래서 이들은 승진하게 되었다. 18.이러다 보니, 다니엘과 친구들은 자기들이 얻는 유익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인정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신앙을 저버리라는 위협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 때문에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고 살았다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자기 감정이 상하는 정도의 손해로도 신앙을 저버리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손해를 본 사람은 그렇게 쉽게 자기의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19.성경은, 사회의 대세의 흐름이 악하게 가더라도, 그 가운에서 하나님 앞에 충성됨을 지키려는 자가 기억되어지고 그와 그 자손에게 축복이 흘러감을 알려준다. “사독”은 다윗이 왕에 있을 때 대제사장으로서 협력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다가 너무나 타락하여 성전이 엉망이 되었고 종교 지도자들도 백성들의 수준과 요구에 타협하여 같이 멸망의 슬라이드를 타고 있었다. 20.다니엘처럼 1차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는 에스겔 선지자가 있었는데, 하나님은 가장 큰 절망을 맛본 이들에게 성전을 재건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세우실 것을 보여주신다. 그래서 에스겔서의 마지막인 48장을 보면 마치 도시계획을 세우는 듯한 내용으로 마무리가 된다. 21.그런데 44:15와 48:11을 보면 사독의 자손들은 유다가 타락하였을 때에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의 직분을 지키고 종교지도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고, 이것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그들을 사용하시고 세우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 38장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예레미야”가 억울하게 웅덩이에 갇혀 있었을 때, “에벳멜렉”이 용감하게 왕에게 나아가 예레미야에게 행한 부당한 행위를 말하고 옷을 엮어 밧줄을 만들어 예레미야를 구한다. 22.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는 절박한 순간에도 용기를 낸 에벳멜렉을 생존하게 하여주신다고 약속하신다,(예레미야9:18)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23.우리 구주인 예수님도 마태복음 16:25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다. /한 코디미언이 백인과 흑인과 한국 사람이 물건을 샀을 때 자랑하는 내용을 소재로 삼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샀는지 자랑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무언가를 싸게 샀다고 자랑한다는 것이었다. 24.내가 손해를 보지 않고 싸게 물건을 샀다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만, 신앙에 있어서 싸구려 신앙, 즉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고 좋은 것만 누리겠다는 신앙은 결코 명품 같은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을 위해서 손해를 보게 되면, 하나님이 이것을 좌시하지 않으신다. 나는 그런 증거들을 숱하게 보았다.25. 이것은 경험하여 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고,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녀들 또한 하나님의 것을 존중하여 바칠 것을 잘 교육한다. 그리고 이런 교육을 받고 경험한 자녀들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린시절부터 하나님의 것을 구분하여 바칠 줄 아는 아이들이 기초가 단단한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26.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간과하다가, 어느새 아이들이 신앙의 기초도, 마음의 힘도 약한 성인들로 자란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지나가지만 본장의 마지막 절은 너무나도 감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다니엘이 나라일을 하던 시대는 역사의 회오리 같은 시기였다. 바벨론은 “메대”에게 메대는 “페르시아”에게 왕권을 빼앗겼다. 이런 시대에서 다니엘은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으로 술을 마시던 “벨사살” 왕에게 나타난 글씨를 담대하게 해석한다. 27.“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여진 것의 뜻은 왕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동하여 함량미달이니 끌어 내리시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자 굴 사건은 메대가 다스리던 시대에 있었던 일이고, 또 이어서 페르시아가 권력을 갖게 되는데, 바로 페르시가의 고레스가 왕이 되던 첫해에 놀랍게도, 그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한다. 포로를 그냥 값없이 돌려보낸 것이다. 28.아니 값없이가 아니라, 다른 곳들을 찾아보면 오히려 많은 물질을 주어서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을 제원을 가지게 하신다. 마치 출애굽하던 이스라엘의 노예들에게 애굽 사람들이 보물을 주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지을 재원을 가지게 하셨던 것처럼, 이들의 귀환은 하나님의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29.이렇게 과거의 죄를 청산한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어렵고 소망 없는 시기에 다니엘과 같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이다.
30.그런데 본장 마지막절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는 구절은 유다 백성이 귀환하는 그 시간까지 다니엘이 고위직에 있으면서, 또한 기도하고 애쓰며 인내하다, 심지어는 죽을 고비까지도 넘기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좋은 날을 그로 하여금 보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여 준다. 31.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위해서 손해마저 감수하려고 하였던 용감하고 신실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을 위해서 손해 본 것을 하나님이 놀라운 섭리로서 감격으로 대체시키셨다. //일제시대때 태평양 전쟁이 극심해지면서 신사참배의 압박이 가중 되었다. 당시에 지방에 있던 교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목사가 없어서 평신도인 장로(elder)나 권사가(exhorter) 교회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32.그러다가 성례가 필요하면 감리사(District Superintendent)가 가서 대신 집례해주곤 했던 것이다. 현재의 강원도 동해 천곡교회를 담당하던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에는 또 “궁성요배”라고 해서 모두가 모여서 일왕이 있는 동경을 향해 고개를 숙여 경배해야 했는데, 그는 모두가 고개를 숙었을 때, 혼자 떳떳하게 서 있었다. 33.왜냐하면 그가 고개를 숙여 경배할 이는 하나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나이가 들어서 노쇠해진 그였지만,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그를 걱정해서 경찰서에서 빼내고 싶었던 감리사는 최권사님이 나이가 많아서 헛소리를 한다고 변명하였는데, 오히려 일본서장이 최권사는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며, 예수 믿으려면 최인규 권사처럼 똑바로 믿으라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다. 34.이 감리사님이 나중에 이때가 평생에 가장 창피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결국 최권사님은 옥중에서 순교하였으나 끝까지 양심의 자유를 지켰고, 하나님은 신앙을 위해 충성을 지킨 최권사님을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과거에 우상과 귀신에 사로잡혔던 한국 사람들이 그나마 예수를 믿고 구원의 길에 서게 된 것에는, 신앙을 지키며 순교했던 많은 분들의 값이 지불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35.그냥 우리가 원래 잘나서 오늘날 국제적 위상이 좋아졌다고 착각하면 안된다. /한번 사는 인생을 자기 눈 앞의 욕심과 혈기로만 사는 덧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하고, 충성을 위해서 헌신하고 심지어는 손해를 보기도 한 사람을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6.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 안에 있는 양심이 스스로를 깨우는 살아있는 성도로 서기를 축복한다.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그 충성을 기억하신다.
바라옵기는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비겁하거나 소심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수고하고 헌신하므로 양심의 자유를 얻고 떳떳한 자랑스러운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