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4:16-25 “의인은 넘어져도 일어난다”
2024년 10월 6일 주일 설교 박성일 목사
1.내가 어렸을 때, 새엄마와 새언니에게 구박을 받고 무시를 당하던 착한 주인공이 그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고 마침내 이겨내고 화려하게 성공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오늘날도 이런 것과 비슷한 구성의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다. “신데렐라”와 같은 구성의 이야기가 전 세계에 5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이겨내고 일어서는 대상을 동경하고 사랑한다. 2.내가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만화 주제가들에도 이런 내용들이 많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비바람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게다가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연인들을 위한 노래를 들어보아도 산이 높고 바다가 깊고 폭풍우가 불어도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라면 끝까지 가겠다는 가사들이 있다. 3.분명히 말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 동안 외부의 압력에 직면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계속적으로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생각지 못한 시간에 집에 도둑이 들거나,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교통사고가 나거나,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속을 상하게 하는 일들과도 같다. 우리가 충격을 당할 시간과 장소과 방법은 “예측불허”라는 것이다.
4.이러한 때, 마음이 단단하고 심지가 곧은 사람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고, 자기 마음이 먼저 무너져 버린 사람은 그냥 주저 앉은 채로 우는 소리만 하면서 자신의 연약함만 드러낼 것이다. 본장 10절을 보면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고 한다. 5./나는 한번 다리를 다쳤다가 그 이후로 아예 집밖으로 나가기도 싫어서 주저 앉은 사람이 아예 다리가 굳어서 그렇게 앉은뱅이가 된 경우를 보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강하게 자신 앞의 문제와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그들에게 동정이 가기도 한다. 6.그러나 그러한 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머물러 있으면서 주위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더더군다나 천국까지 가기 바란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게한다. 물론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천국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약한 상태에 있으면 그나마 이전에 생겼던 믿음의 상태마저 부서져 버리기 쉽다. 우리는 주님이 보시기에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서야 하지 않겠는가? 7.물론 기질적인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인생 가운데 있는 연단을 넉넉히 받아들여야 약한 사람 또한 성장하고 신뢰받을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불꽃을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8.쓸데없는 것에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시기심에 잡혀서 추해지는 삶이 아니라, 진정코 가치 있는 것에 인생의 열망을 쏟아 넣는 것이 지혜롭다. 어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드러난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의 삶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게 된다. 9.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신뢰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세상을 의롭게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이후에 자신이 비난하던 사람보다도 더 타락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면서 인간이 외치는 정의가 얼마나 공허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10.내가 젊었을 때에는 “민주주의”가 지고의 가치처럼 포장되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민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왔는데,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에 있어서 타락한 형태로 보았다. 모든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게 되면 이 사람들을 선동하는 세력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렇게 사람들을 선동하고 잘못 인도해서 사람들 좋은대로 해주겠다고 마음을 산 후에 세상을 망치는 일이 나타난다고 한 것이다. 11.이것은 2500년전의 사람이 한 말인데, 오늘날이라고 다르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세상의 정의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는 순간 그것은 갈등과 오해밖에 되지 않는다. 12.사람은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도 아니면서 남의 잘못에는 대단한 과장과 왜곡의 굴레를 씌우고, 동시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단히 신속하게 합리화를 해 버린다. 그러므로 자기 혼자 정의롭다고 외치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잘못과 부족을 인정하는 사람이 훨씬 더 신뢰할만한다. /13.어떤 노인이 요즘 세상이 말세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을 비난만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자기 손자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도 않을 것이고 모른체 할 것이다. 나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본인이 제일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는데, 일단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거나, 또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반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젊은 사람들도 그 말을 듣게 되어 있다. 14.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과거를 넘어서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았다면 그것은 세대를 넘어서 소통하게 한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의”나, 어떠한 정치체제가 우리의 우상이 되는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고 마음의 중심을 두는 사람에게 우리가 감히 “의인”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15.그러나 이러한 의인은 어떠한 대단한 사람 혹은 엘리트 집단에게만 붙이는 호칭이 아니고, 오늘날 천국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이 인생을 사는 동안 성취해야 할 목표와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6:33)”고 하셨다. 16.심지어는 마태복음 7:21에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우리가 의로워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있다. 17.물론 우리가 다 너무나도 고상하고 믿음 좋은 부모님과 환경 속에서 너무나도 좋은 친구와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자랐으면 참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더러운 물이 자신을 오염시키고 때가 탄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18.그리고 양심적으로 스스로를 보았을 때, 과연 내가 의롭다는 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태도보다는 훨씬 양심적이기는 하지만, 갈라디아서 3:11은 의인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나의 능력과 나의 주장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는 단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내 안의 보좌에 앉아 계신 것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19.아브람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기대했지만 당장 눈 앞에 벌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인내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한다(창세기15:6). /20.우리가 부족한 죄인들이지만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에 이르러야 하는데, 이것을 돕기 위해서 내려오신 분이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가 일단 의에 길에 들어섰으면 거기서 밀려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의인은 그 안에 하나남이 임재하심으로 마음의 힘과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21.자신 안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고, 신앙을 통한 소망도 없다면 이 사람은 구원을 위한 의가 비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이끌림을 받는 의인은 본문 16절의 말씀처럼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22.그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아주 하찮은 것들도 포장해서 본인이 꽤 괜찮은 신앙인으로 보이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말만 들어보면 목사인 나보다도 더 은혜스럽게 사는 것처럼 들리는데, 황당하게도 별 것 아닌 일에 넘어져 버려서 사라져 버린다. 23.신앙의 진짜 힘은 중간 중간에 예기치 않게 벌어지는 충격이 있더라도 이것을 이겨내는 회복력에 달려 있다. 당연히 이러한 회복력이 있어야 꾸준함을 유지하는 것이고, 이러한 꾸준함이 성도의 진정한 진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누구도 마음의 폭풍우는 경험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일어나는 그 용기와 그 기상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쌓는 것이요 주변의 성도들에게도 귀감이 된다. 24.나는 살면서 누군가를 보면서 “저 사람처럼 살아야지”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과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을 보았다. 한번 넘어졌다고 바닥에 엎드린 채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원망만 하는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동정심이 들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게 있으면 결국은 거리를 벌이게 되고, 이렇게 일어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이 진정한 수치가 되는 것이다. 25.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의인은 이렇게 일어나는 힘을 가진 사람인 것이고 이러한 상태가 발전되면 이제는 시기심과 비교에 의한 충동에 대해서도 마음에 파도가 일렁이는 상태를 넘어서게 된다. 사람들은 남이 잘되면 시기 하다가도,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잘 안되면 기분이 좋다. 그러나 본문은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엎드러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한다(17). 하나님이 남이 안될 때 좋아하는 모습을 기쁘지 않게 받아들이시고 그 진노가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26.물론 우리는 나보다 정직하지도 않고,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편법을 쓰거나 부당하게 돈을 모은 사람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화를 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가 가진 물질에 대한 시기심이 진정한 원인이라면 이것 또한 넘어서야 한다. 동시에, 악한 자의 편에 붙어서, 가령 재판을 할 때 그의 편을 옹호하는 태도 또한 선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27./그리고 본문 25절처럼 악한 자에게 그러지 말라고 견책을 할 정도가 되려면 스스로 바르게 서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편법과 술수를 통해서 살아온 사람이 사람들에게 세상이 말세라고 한다면, 당신이나 잘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애초에 악한 자 앞에 당당하게 말할만큼 스스로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은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28./이렇게 자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안되었고 좋다고 떠들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는 말들을 쏟아내고 반역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거기에 어울리는 말을 하며, 악인을 두둔하는 말은 하나님 귀에도 들리게 된다.
그러나 본문 24절을 영어성경으로 보면 “An honest answer is like a kiss on the lips”라고 한다. 29.의인은 이렇게 인간의 악한 본성대로 함부로 떠들고 시기심에 이끌려서 충동 당하는 것을 넘어서는 사람인 것이다. 나는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의 갈등의 주된 이유가 열등감과 시기심인 것을 어려 번 보았다. 30.우리가 마음을 담대하게 하는 연단을 받아야 되는 이유는 이렇게 마음의 격정이 통제가 되면, 시기심의 파도가 몰아쳐도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파도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의 폭발로 인하여 지켜야 할 둑이 무너지면 말도 함부로 하게 되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게 된다. 31.파도가 밀려올 때, 지나치게 반응하지도 말고, 너무 마음에 담아 두면서 그것을 두고두고 상기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의 성장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사람들은 하라는 성경말씀 묵상은 안하면서, 자기에게 시기심을 일으킨 사람의 상태나 말에 대해서 두고두고 묵상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린다. 32.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사람이 넘어져도 일어날 만한 회복력을 가진 사람일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런 가르침에 대해서 자기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시기심이 불일 듯하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열등감이 자기를 더 쓸데없는 욕망에 빠지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33./이런 상태의 상당부분은 미안하지만 자기 부모님에게 온 것이다. 자기의 의식 속에 이미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도 비교 당하는 것 때문에 속상하고 분노했으면서 자기 남편을, 자기 아이들을 자기 주변 사람들을 비교하고 압박하면서 괴롭게 한다. 34./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남의 나라를 지향한다면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셨다.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았을 때, 여전히 이러한 굴레에 있다면 매일의 삶 가운데 스스로를 돌이켜 보고 나를 삼키려고 틈을 노리는 과거의 나를 죽여야 하다. 35.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였다. 예수의 부활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그 안에서 능력을 보았던 바울은 삐뚤어졌던 과거의 자신이 매일 매일 기어나오려고 하지만, 그것을 매일매일 죽이고 예수의 부활처럼 자신이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나야 자신이 온전히 사도의 삶을 살 수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36.이것이 처음에는 심각하고 어렵지만, 일상이 되면 과거의 자신을 이겼다는 자신감이 이제는 확신이 되어서 오히려 주님 안에서 승리하는 것을 즐기게 되고, 이전보다는 훨씬 덜하게 과거의 자신에게 격동 당하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한 때 잘하던 사람도 영성생활의 흐름이 끊어지면 아무리 자기가 스스로를 포장해도 형편없고 추한 상태로 추락해 버리는 것이고, 다시 원상태로 끌어올리기가 대단히 어렵다. 37.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마음이 상하는 일을 누구나 어느때나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의를 지키는 사람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서는 것으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할 수 있다. 38./나는 옛날에 어른들이 왜 이렇게 “나의 등 뒤에서”를 좋아하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보니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때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39.한편으로는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못난 과거와 기질 때문에 넘어져서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 많은 성도들의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시고 등을 밀어서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라고 독려하신다.
40.더더군다나 주님은 높은 보좌 위에서 우리를 판단만 하시고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세상에 내려오셔서 유약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핍박받고 욕먹고 고난 받으시고 오해 당하셨고, 마침내 골고다 언덕에서는 무거운 십자가, 자신을 못박을 사형도구인 십자가까지 지셨다. 41.그런 주님이, 우리의 본이 되시는 구원자가 넘어져서 못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손을 잡고 세워 주신다. 나는 “Sight And Sound Theatre”에서 “Jesus”라는 초대형 뮤지컬을 보았는데, 큰소리를 다 쳐놓고 정작 파도 앞에 겁을 먹고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손 내밀어 건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42.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연단의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 속에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인지를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구주는 당신의 부족한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분이시고, 그의 백성이 넘어질 때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시다. 43.자기가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해서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힘든 사람은 “주님 저를 일으켜 주세요, 제 손을 잡아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기도하기 바란다. 우리 주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고, 자신을 찾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44이렇게 주님의 도움을 받아 일어섬으로, 우리의 신앙인생이 추하게 쓰러진 채로 마감되는 자가 아니라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중간 중간의 시험에도 넘어지지 않고 일어나서 주님 앞에 온전히 서는 의인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