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3:18-4:6 “예수를 통해 새롭게 사는 삶”
2024년 10월 20일 주일 설교 (박성일 목사)
1.세상에는 예수를 어설프게 믿는 사람들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에 가보면 제대로 공부하는 학생도 있고, 차마 학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아이들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왕 예수를 믿기로 결정했으면 제대로 믿다가 가야 하지 않겠는가? 2.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태에 대해서 잘못된 것에도 합리화를 시키거나 변명을 한다는 것이다. “저기 봐라, 저 사람은 장로인데도 저렇게 한다, 그러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뭐가 문제인가?”라면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각성하기 보다는 대충 그렇게 덮고 가려고 한다. 3.천국은 나의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남이 잘 못한다고 나도 잘못했다면 둘 다 같이 천국이 아닌 곳에 가는 것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사람은 피차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받기 쉬우므로, 혹시 자기가 남들을 멸망의 길로 가는데 이유가 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그것에 대한 대가가 있을 것이다.
4.지금까지 살면서 아직도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각성하고 잘 해보려는 결단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껍데기 신앙이다. 신앙의 성장은 반드시 의지적인 결단을 동반하게 되어 있다. 이것 없이 저절로 성장하는 일은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일에 있어서 빈통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5./나는 10여년 전에 새벽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 내가 목회하는 동안은 설교 쓰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평신도들도 삶 속에 과거와는 다른 어떤 변화를 위한 결단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골로새서 3:1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6.그리고 다음 절도 보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5절도 보면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한다. 사람의 영적인 수준은 그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나타난다. //한 교도소의 한 방에 두명의 수감자가 갇혀 있었다. 7.그리고 방에 창문이 있어서 밖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한명의 수감자는 바로 감옥 앞을 흐르는 더러운 개천을 보았다. 거기에는 쓰레기가 쌓여 있고 냄새까지 났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이 더러운 물을 보면서 자기가 이런 곳에 갇혀 있다고 불평하고 원망했다. 그런데 다른 수감자는 역시 갑갑하고 마음이 무너지기 쉬운 감옥생활이지만, 저 멀리 언덕위에 있는 풍경을 보았다. 8.거기에는 꽃이 피고 나무가 우거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양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구름은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똑 같은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바라보는 것이 다르다면 그 마음의 상태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경기도에서 부목사로 섬겼을 때, 다른 곳에서 오신 담임목사님이 툭하면 전에 살던 곳과 비교해서 현재 본인이 목회하는 지역을 비하하였다.
9.물론 나도 그 지역이 너무나도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목회하는 지역을 비하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목회하는 곳은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곳으로 믿고 긍정적인 것을 보기로 하였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나를 환영해 주고, 갈등도 없으며, 날씨는 일년 내내 완벽하기만 하고 자연재해는 전혀 없고,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런 곳이 어디에 있는가? 10.당연히 어디에 가든 마음에 들지 않고 마음 상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몇 주 전 월요일에 교역자 회의 때문에 오렌지 카운티에 갔는데 한 여자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설교를 하라고 했더니 자신의 한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대학 다닐 때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영화로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기로 하고 신학대학원을 다녔다는 것이다. 11.그런데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회를 겉으로만 보았기에 무지했는데, 알고 보니 교회내에서도 갈등과 싸움이 있고 또 주님의 길을 걷겠다고 나선 자기가 욕을 무척 먹고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독신 선언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금같이 생각해서 투신했는데, 현실은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더란 것이다. 12.그래서 관두려고 했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도 현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그 시선과 마음을 두어야 온전히 성장하고 전진할 수 있다. /골로새서 3장을 보면 끝부분까지 예수 안에 새롭게 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려주고 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골로새서 3장을 잘 읽어 보기 바란다. 13.8절을 보면 분함과 노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을 벗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 마음의 더러운 것을 청소해야 하고 말도 바뀌어야 한다.
오늘 본문인 4:6을 보면 여기에 대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에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공동체의 기운을 빼앗고 소망을 가린다. 별로 도움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특별히 봉사하거나 돕지도 않으면서 공동체의 힘만 빼고 다니는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볼 수 있다. 14.우리가 음식을 그냥 먹으려고 하면 먹기 힘든 것도 소금을 치면 그 맛이 달라지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신앙공동체에서는 이렇게 좋은 것으로 바꾸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기의 마음의 힘을 빼앗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15.그래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멀어지게 한다. 혹시 자기가 부정적인 말투와 저주가 남발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기도하고 각성해야 한다. //다시 돌아가서 3:9을 보면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며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하고 다음 절에는 이것에 대해서 그 안의 지식까지 바뀌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16.즉 믿지 않는 가정과 사회에서 심겨진 지식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지식과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면 그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우리에게는 그 안에서 예수를 제대로 알고 무엇이 중요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 17.그러므로 절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무식해서는 안된다. 물론 자신의 학력이 약할 수도 있지만, 예수를 아는 것에 있어서 무지함은 우리를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호세아서 4:6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하신다. 자기가 예수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제대로 된 자기 생각도, 성격을 통한 지식도 없으면서 아는 척하고, 있는 척하고 살아가는 태도는 언젠가 그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18.그리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주님의 용서하심을 신뢰하기에 자기도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 마음 속에 주권을 가진다. 이렇게 지식, 즉 예수님의 말씀이 그 안에 풍성하게 되고, 평강을 누리는 자는 3:16-17을 보니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사람인 것이다.
19.여기까지 듣고서는 “참 좋네,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가면 바로 갈등과 분노를 느끼기 쉬운 대상들에게 이것을 실제로 적용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도 많은 부부가 갈등 속에 힘들어 한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에게 공감 못한다고 화를 내고, 남편은 아내의 선을 넘는 언어폭력과 압박 때문에 힘들어한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헤어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쉽게 헤어지기도 한다. 20.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위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어떻게 현실을 살아야 하냐면,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이것이 주 안에서 마땅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일생을 한여자에게 속하기로 결단하는 청혼을 찍은 비디오를 쉽게 볼 수 있다. 21.남자가 여자에게 결혼하겠다는 것은 앞으로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며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지 않고 당신에게 헌신하겠다는 일종의 종신계약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인생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옆에서 보는 여자들도 울고 남자들도 운다. 22.어떤 남자는 청혼을 하는데, 너무 감격해서 자기 여자친구보다 자기가 먼저 울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내 입장에서는 남편이 꼭 훌륭하고 남자답고 용기있어 보이지 않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평생을 같이 살겠다고 결단하고 그것을 진행하는 것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당신의 기준으로는 놀랍게도 여자에게만 어떠한 강조를 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한다. 23.에베소서 5:25을 보면 남편들에게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한다. 즉 목숨 바쳐 사랑하라는 것이다. 복종이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이나 둘다 어렵고 중한 것이지 않은가? /이어서 자녀들은 부모님께 순종하라고 하며 이것은 주 안에서 기쁜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과거에는 유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을 지고의 선이요 가치로 여겼다. 24.그런데 부모는 자식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듣고 자란 것이 없다 보니까, 자기 부모님이 자기에게 한 대로 자식에게 하고 살았다. 그런데 자기 부모님을 보고 배운 것 중에 배우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많았다. 한 명의 자식을 혼내기 위해서 다른 자녀와 비교하고 인격을 무시하고 수치심을 주는 방법말이다. 25.내가 아는 분은 자기 형제가 8명이었는데, 자기 부모님이 혼내는 방법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고 밖에 눈이 오나 비가오나 옷을 홀랑 벗겨서 집밖에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수치심과 당혹감에 빠진 것에 대한 경험이 그 마음의 성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러니 멘탈(mentality)이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26. 3:21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한다. 또한 당시에 교회에 주인과 종이 같이 다니다 보니 상당히 예민한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본문은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고 눈가림식으로 요령 피우면서 일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리버사이드” 카운티에서 오렌지를 따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스럽게 따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다”고 가르치셨다는데, 같이 교회 다닌다고 건방지게 굴면서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는 것이다. 27.3:23을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은 더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3:25을 보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고,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어서 상전들이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라고 한다. 지상에서의 상전들도 하늘에 계신 주님을 의식하고 살라고 한다. 그러니 상전들도 아래 사람이라고 종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28.이처럼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은 상호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현실을 사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자기에게 잘 해주지 않았다고 마음이 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성경은 모든 관계가 상호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29.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축복과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알기 힘쓰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누가복음6:31을 보면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지향점이 바뀌고 생활의 태도가 바뀐 새 사람이 기도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나면, 본문 4:2을 보니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한다. 30.어떤 사람은 자기 급하거나 속상할 때만 기도한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 백 번 낫지만, 평상시에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스스로를 당당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또한 바울은 당시에 선교지를 돌아다니며 선교하는 자신의 팀을 위해서 골로새 교인들이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자신이 이 일에 매임을 당했는데 전도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로 도우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의 힘을 얻게 되면 4:4절의 말씀처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니라”고 한다. /31.전쟁을 나가서 적과 싸우는데 자기 소총만 들고 나가서 거대한 적과 싸우는 사람과, 뒤에서 커다란 대포로 적을 향해서 포격을 해주고 전투기가 날아와서 적을 공격해 주는 사람과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예수를 지향하며 변화된 사람은 매일같이 자기 감정도 추스리지 못해서 자기를 위한 기도만 간신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영광된 일에 대해서 기도로 지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2.동시에 신앙적이지 않은 외부의 일이나 사람으로 인하여 지나치게 에너지를 소비하고 정신이 팔려서 결국 신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는 인생을 살지 않아야 한다. 4:5절은 세월을 아끼라고 한다. 물론 오늘날 사람들의 수명이 대체적으로 연장되었지만,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얼마나 가치있게 살았느냐는 것이지 않겠는가? 33.이렇게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힘있게 전달한 바울은 사실 편안한 상태에서 본문의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골로새서 4:18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이 글을 친필로 적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매인 것을 생각하라고 한다. 34.즉 자신이 이렇게 감옥에 갇혀서 고통 당하면서도 성도들이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살기를 간구하는데, 이것을 생각하여 진실되고 열심히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당연히 구원의 문을 여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다는 자체가 커다란 축복이다. 그런데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그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거룩한 존재로서 성숙해 나가야 함을 의미한다.35. /고등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의대에 들어갔다고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도 짧은 지식과 경험으로 자신을 제한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늘 성장해야 한다. 언제까지?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까지이다.
36.원래 예수를 믿지 않던 조선이 변화된 큰 사건이 1907년도에 있었던 대부흥 운동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집회를 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과거의 못된 것을 끊고 앞으로 제대로 살겠다는 결단의 시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가 클 수 있었는데, 오늘날도 자신의 과거를 끊고 새롭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하나님의 눈길과 손길을 불러오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불러 들인다. 37.우리는 자신의 생활을 바꾼 “삭개오”를 보면서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알고있다. 이왕 예수 한번 믿고 가는 삶, 가라지가 아니라 진짜 알곡 같은 성도가 되기를 축복하고, 그렇게 결단할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간구한다.
38.바라옵기는 한번 예수 믿는 삶, 부끄러움이 없는 결단의 성도가 되어서, 자신의 삶도 축복을 누리고 선한 영향력을 끼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