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14-26 “하나가 되야 하는 이유”
2024.8.18 주일 설교 (박성일 목사)
1.우리가 18세기를 배경으로한 전쟁 영화를 보면, 정말 이상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군인들이 화려한 색깔의 군복을 입고 줄을 맞추어 전체가 같이 전진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러다 보면 자기 몸을 숨기기가 어려워서 겁이 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저렇게 전체가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비효율적인 것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들것이다. 2.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무기를 잘 알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에 사용하던 총은 사정거리도 상당히 짧았고, 총을 장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총구 앞으로 총알을 넣야 했기 때문에, 엎드리거나 몸을 숙여서 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사 빈도가 낮은 상태에서 병사들 각자가 따로따로 쏘는 것보다는 전체가 한번에 열을 맞추어 한번에 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3.그렇다면, 어떤 이는 그냥 하던 대로 활을 쏘지 뭐하러 총을 쏘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화살을 많이 쏘아봤는데, 상당한 힘이 들어간다. 처음 하는 사람은 활시위를 당기지도 못한다. 그러니 전쟁이 나도 기껏해야 20번 정도 활사위를 당길 수 있었고, 게다가 활을 능숙하게 다루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4.더 과거로 가서 “로마”는 당대 육지의 1/4을 지배한 대제국인데, 이들 또한 방패를 들고, 짧은 칼을 잡고서는 전체가 열을 맞추어 전진하였다. 각자 싸우는 것보다 이렇게 전체가 하나가 되어 싸우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도, 우리의 영성생활을 더 효율적으로 하고 힘을 얻기 위한 부분이 있다. 사실, “나는 믿음이 있으니까 교회 안 나가도 돼”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5.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꼭 교회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논리이다. /우리가 주일에 기도하는 기도문장 중에 오늘 참석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같은 복을 내려 달라는 것이 있다. 한국에서 언제 이것이 형성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는 몸이 아프거나 극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마음은 너무나도 교회에 오고 싶지만 올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람들을 위한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나서, 마음에 섭섭함이나 불편한을 가지고서 이제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덕이 되고 성실한 신앙인을 보기란 거의 어렵다. 6.처음에 마음은 그렇게 먹었어도 자기 혼자 서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들에게 한 말은 있고, 자존심은 있어서 돌아가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물론,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당연히 불편하거나 속상한 일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훈련이고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성도가 성장하는 것이다. 7./어떤 엄마가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아이들과 불화가 있어서 이제 학교 가기 싫다고 할 경우에, 그럼에도 현실에 부딪히면서 사람 사이에서 사는 법을 체득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아이가 다른 애들 때문에 학교 가기 싫다고해서 아예 자기가 감싸고 끝까지 공부를 시킨다면, 누가 이런 아이에게 결혼하고 싶거나 고용을 하고 싶겠는가? /세상 어떤 공동체든지 보기 싫은 사람은 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8.그런데 누구 보기 좋다고 교회 다니고, 누구 보기 싫다고 교회 안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자신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살면서 보니까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더 성숙해서 품이 큰 사람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품을 넓혀가며 마음을 단련하는 사람이 은혜롭고 덕이 되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9.반대로, 사람이 자기 좋은 사람만 불러다가 자기 세력을 늘리고 목소리를 높이고 압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키우는 것은 정치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공동체에서 당을 짓는 것으로 인해서 교회에 덕이 되는 경우를 본적이 없다. 우리는 최소한도 세상의 정치적인 흐름이나 생각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는 안된다. 10.갈라디아서 5장 하반부를 보면 성령의 열매와 이와 반대 되는 육체의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20절만 보면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 이단”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화가 나서 사람들을 끌어 모이고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명확하게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11.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권고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흐름 중에 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 자기를 따라온 제자들을 가슴 아픈 눈으로 보셨다. 물론 그 중에는 이미 예수님을 팔아버리려고 배신한 자도 있었다.
그런데 13:30에 보니 “가룟 유다”는 이미 나가 버렸다. 예수님은 유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그 무거운 마음 속에서 제자들을 위해서 가르침을 주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12.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유다처럼 배신한 자도 있었고, 또 자기들끼리 시기하고 서열을 가지고 싸우는 일이 나타났다. 예수님은 이들의 이러한 다툼이 가슴 아프셨다. 그래서 이제는 서로 누가 높은지를 가지고 싸우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자신도 고난을 받으실 것을 아셨고,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 또한 고난을 당할 것을 아셨다. 13.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의 군사로서 단단히 서는 것이었다. //전쟁사를 보면, 집단으로 열을 맞추어 전진하는 두 군대가 싸울 경우에 당연히 제일 앞에 서 있는 군인들이 가장 힘이 든다. 그러면 뒤에 있는 병사들의 라인이 앞줄을 밀어주고, 때로는 교대해서 위치를 바꾸어 준다. 14.이렇게 양쪽의 라인이 부딪힐 때, 대단히 힘들고 죽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놀랍게도 이 때에는 죽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견디기 힘들기는 하지만 정작 많이 안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견디기 힘들다고 자기 자리를 이탈해서 떨어져 나가고 적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 사망자가 급격히 치솟아 오른다. 15.전쟁 사망자의 70%는 이런 상황에서 발생하게 된다. 우리도 자기 힘만으로 버틸 줄 알았지만 버티기 힘든 상황을 겪게 된다. 그래도 이러한 때에 나에게 용기를 주는 대상이 옆에 있으면 버틸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앞으로 어려움을 뚫고 가야 하는 제자들에게 16:33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16.예수님은 본인이 잡혀 가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같은 장 23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고 하신다. 게다가 예수님은 어려움을 앞에 두고도 제자들이 그 안에 기쁨을 충만하게 채울 것을 강조하신다. 우리 모두는 기쁨을 누리기 원한다. 17.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눈을 자극하고 흥분을 시키는 감정에만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 기쁨을 채우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은 무척 변동적이고 간사하기 때문이다.
내가 휴가를 가서 어떤 좋은 풍경을 보았다. 마음이 즐겁고 좋았다. 아마 이때의 흥분을 100이라고 지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틀 뒤에 똑 같은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틀 전에 본 것을 또 보았는데, 흥분이 7이나 8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18.그러면서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람이 자기 감정의 흥분이나 감격을 따라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지속력이 짧고 신뢰하지 못할 만한 것인가를. /나에게는 목회를 하면서 굉장히 감격스러운 일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겠다고 뭔가 감격을 주는 모임이나 프로그램을 쫓아다닌다. 19.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부부간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불편한 부부생활을 기피하기 위해서 이런 단체에 목을 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감격은 그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큰 감격이나 자극을 쫓아다니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우려고 하지만, 이런 모습들이 별로 덕이 되지 않는다. 20.우리는 자신의 감정적인 감격이 아니라 일상의 감사를 보는 눈을 가지고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지속적이고 나를 키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령 즉 삼위일체와 협력하고 세우는 태도를 보여 주시며 자신이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것에 대한 유익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신다. 21.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충만하게 되면서, 즉 사람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의 충만함을 통하여 지혜를 얻고 힘을 얻게 되었으며, 그래서 비록 고난을 받게 되었으나, 그것으로 좌절하거나 마음 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자랑이요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다. 22.그리고 이들은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지속력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이미 물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훈련 받고 일상적인 가르침을 받았다. 바로 이러한 틀이 완성된 것에 성령이 부어지면서 이들이 진정한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때로는 감흥이 없는 신앙의 일상을 살기도 한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는데, 감흥도 없고 메마른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은 자신만의 영적인 구조물을 잘 쌓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 23.그것을 채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땅을 파고 돌을 돌아가서 쌓은 것이 우물이 되듯이, 어느 날 자신의 신앙의 구조물 가운데에 성령이 나도 모르게 차오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꾸준하게 다져가는 신앙의 기초가 중요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기초를 어린 시절부터 쌓은 사람보다는 나중에 감격이나 감동 속에 신앙생활로 들어온 사람이 무너져 내리기가 훨씬 쉽다. 24.쉽게 말해서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었으면 더욱더 열심을 내서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고 약한 부분을 보강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령을 높이시고 본문 21절을 보면, 자신의 본이 제자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셨다 25.“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예수님은 본인이 보이신 연합의 태도를 제자들이 닮기를 기도하신다, 22절에 보면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다. /26.성도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 자신과 비교 되는 부분도 있고, 이것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주변 사람을 전도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자기가 전도한 사람이 자기보다 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목회자에게도 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게 못마땅해서 상대를 흠잡고 깎아내리고 원수가 되는 것을 보았다. 27.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이렇게 자신의 시기심을 자극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쓰라림을 넘어서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는 사람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울에게서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들어왔을 때, 그의 광기는 시기심에 잡혀서 망하는 길로 향하게 된다. 28.성도가 직분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기 안에 있는 시기심과 남들과 비교해서 생기는 분노와 불편함을 극복하지 못할 때, 이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 영광은커녕 주님 이름에 얼룩을 지게 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같은 지역에서 물고기를 잡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누가 더 많이 잡았는지에 대해서 가시적인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29.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갔을 때에는 누가 예수님과 더 가까운지에 대해서 의식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신의 정치적인 자리매김과 연결이 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같은 지역 혹은 같은 직종의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서러 비교하고 시기심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도 자극을 받거나 속상해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있나 보다 할 것이다. 30.그런데 자기가 물리학계에서 저명하고 대단한 사람이라면, 자기 동료가 노벨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 맘이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교회에서 누군가가 권사에 임명되면, 그날 오후에 몇 사람이 모여서 투덜거리던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는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교회가 흔들리기도 하였다. 예수님도 제자들 사이의 시기심과 갈등과 비교의식을 잘 아셨다. 그런 부족함을 아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을 주의해서 기억해야 한다. 31.본문 23절을 읽겠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여 함이로소이다.” /즉 우리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드러내는 것임을 예수님은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32.자기가 선택한 배우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고, 자기 배로 낳은 자녀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는데, 서로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오해와 충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엄과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도는 연합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 33.예수님은 26절에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 장면을 보니 유다에게 팔려서 잡혀 가신다. ///자기를 충동하는 감정을 이기는 사람이 참을 수 있고 연합할 수 있다. 34.그러므로 하나가 된다는 것은 훈련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욱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며 혹시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이것을 반성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공동체와 손을 맞잡아야 한다. 한번 사는 인생,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영광을 돌리는 가치있는 삶을 살기를 축복한다.
35.바라옵기는 신앙공동체 속에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알곡과 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