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6:53-6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2024년 8월 11일 주일 설교 박성일 목사
1.“사람은 감사하는 존재인가?”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내가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면 상대는 100% 감사하고 은혜를 기억하며 살게 되는가? 아니 남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심지어는 내 가족도 내가 하는 수고에 감사하며 나를 존중해 주는가? 어떤 때는 자기 가족이지만, 이들을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2.우리는 오늘날 주어지는 좋은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나아가서는, 더 좋은 것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품거나 항의까지 한다. 그리고 사람은 간사하다. 너무 추운 날 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며 얼어붙은 전면유리 때문에 고생하면서, 더운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3.그런데 또 너무 더워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고 머리에 무리를 느끼면, 추운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은 현재의 상태보다 더 좋은 상태를 지향하게 되어 있다. 어쩌면 그러한 욕심 때문에 우리의 사회가 발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어려웠던 시절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현재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4.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품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신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남들과 비교를 하면서 자기를 돌이켜 보면, 이런 선한 마음이 생기려고 하다가도 사라진다. 가령 내 월급이 1000불이 올랐다고 하자.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고등학교때 나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의 월급이 2000불 올랐다. 그러면 자기는 이전보다 좋은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누군가에게 1000불을 빼앗긴 느낌을 가진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은 자기와 비교가 가능한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벌어진다.
5.그러다 보니 전에는 상당히 친밀하게 속 이야기까지 다 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어떤 공기업에 다니는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명은 나이가 몇 살 많은 팀장이었다. 그런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몸까지 상한 것이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사직하고 쉬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친구가 팀장이 되었는데, 막상 자리를 맡고 보니 너무 힘들어서 자기도 관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마다 먼저 관둔 친구가 자기를 위로해 주고 누구보다 이해해 주고 조언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6.그런데 팀장도 어느덧 하다 보니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이런 상태에 대해서 전 팀장인 친구에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가 이 제 더 이상 회사 일을 듣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고, 그런 태도가 섭섭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런 미묘한 감정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가? 7.그런데 우리가 주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욕심을 부리며 올라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듬어진 것을 기억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 나라가 요새 많이 발전을 했다고 자부심을 느끼는데, 사실 한국전쟁때에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8.프랑스의 중장이었던 “랄프 몽클라르”는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서 대대장 직책을 맡고 계급도 중령으로 낮추었다. 장군이 중령의 계급을 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상식을 벗어나서 헌신했던 사람들을 종종 찾아 볼 수 있다. 9.심지어는 “Reckless”라는 해병대에서 사용한 몽골말(Mongolian horse)은 헌신적인 전투지원으로 말미암아 계급장까지 받고, 종전 후에는 비자를 받아 미국에 왔으며, 그 동상이 현재까지 세워져 있다. 이 말은 총알이 빗발치는 고지에서 포탄을 나르며, 부상도 당했지만 때로는 사람처럼 몸을 숨기기까지 하며 기대 되어지는 임무를 수십차례 수행했다는 것이다.
/10.몇 년 전에 부모님이 방문하셨는데, 교회가 있던 동네는 원래 탱크나 대포 같은 무기를 만드는 지역이었고, 동내 전체에 참전한 군인들의 사진을 일년 내내 걸어 놓았다. 그리고 공원에 가면 전사한 동내 사람들의 명단이 있는데, 한국 전에 참전해서 목숨을 바친 병사도 200명에 달하였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어머니는 공원 바닥 타일사이로 난 풀을 뽑으시면서, 너무 고마운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고 이렇게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1.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좀 잘살게 되었다고 큰 소리치지만 정말 비참하게 당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 끝까지 내몰렸던 사람들, 낙동강이 무너지면 정부를 남태평양의 서사모아까지 옮기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나라의 사람들은 저절로 오늘날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어디에서 일어섰는지를 생각하고 겸손해야 한다. 12.나는 망가진 교회가 순식간에 세워지고 번성하자, 과거에 겪은 고생을 금방 잊어버리고 교만해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전에 세들어 살던 교회를 일부러 찾아가서 보곤 했다. 우리가 오늘날 좋은 것을 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고, 그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고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겸손한 태도로 서는 것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요, 이러한 태도는 항상 주님을 묵상하고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상적인 영성생활을 통하여 유지되어 질 수 있다.
13./순간적으로 누구보다 은혜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좋은 것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성도의 진위를 드러내는 것이고 이것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강함이다. /오늘 본문은 이미 1차로 포로로 잡혀간 에스겔과 그 무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다. 몇 년 있다가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 또한 이러한 징계를 즐기신 것이 아니셨다. 14.그래서 본장을 처음부터 잘 읽어 보면 원래 처음에 형편없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건지시고 키우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음을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예루살렘으로 지칭되는 유다는 태어났지만, 배꼽줄도 자르지 아니하였고, 몸을 감쌀 강보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 아기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 피투성이에 발짓하는 아기를 보고, 하나님이 의지를 가지고 살리시려고 한다. 15.그래서 이 아기를 맡아 키우신다. 우리는 왜 하나님은 세계 여러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너무 훌륭하고 자격이 좋고 대단해서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신명기 7:7을 보면 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16.이왕 선택하시는 것, 가장 수효가 많아서 그 영향력을 빨리 펼칠 수 있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한 자를 자비로 선택하신 것이다. /본 장을 쭉 보면 하나님은 유다의 몸에서 피를 씻어내시고, 기름을 바르고 수 놓은 옷에 좋은 신발과 장신구들을 달아 주시고 왕관을 머리에 씌우셨다. 17.이것은 이스라엘이 형편없이 이웃 나라에게 시달리다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지나면서 세계적으로 융성해진 시간을 생각나게 한다. 13절은 이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이렇게 버려진 아기와 같던 존재가 그 위상이 올라가고 화려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부어주심 속에 가능한 것이었다. 18.그런데 이렇게 상태가 좋아지니 그 힘과 재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저버리고 타락하는 것에 몰두하게 되었다. 15절을 보면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함으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고 한다. 19.놀랍게도 어려움에서 건지시고 좋은 것을 베푸신 하나님을 잊어버린 유다는 정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몸을 파는 여자가 아니라, 오히려 돈을 주고 자신의 정욕을 해소하는 타락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가나안 지역에는 오늘날 시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성적으로 타락한 문화가 있었다. 20.레위기 18:3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를 행하지 말라고 하며, 성적으로 금해야 할 내용들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가나안 지역에서는 자식을 불에 바치고, 동성 연애 정도가 아니라 짐승에게도 자기의 성욕을 배설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21.그러니 거의 사람으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짐승 같은 행동을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배제하실 것을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충분히 실행하지 못했고, 그 영향력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아니 남은 정도가 아니라 멸망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사람이 짐승 같은 본성에 따라 살며 이것을 지지해 주는 우상에게 빠지게 되니, 이것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사실 우리가 성경말씀에 충실하며 사는 것보다, 우상숭배하는 것이 훨씬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망해 가는 것이다. 22.정통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오시는 시간을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언제 그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 원초적으로 질문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이 부분을 알 수 없고, 시간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겸손이요 바른 태도이다. 23.그러나 이단은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데, 눈 앞에 보이는 대상을 우상으로 만든다. 그러니 훨씬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성도를 타락하게 만든다.
본장에서 유다는 거의 정욕에 미친 존재로 묘사된다. 심지어는 오래 전에 멸망한 소돔도 이들만 하지는 않았으며,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도 유다의 죄의 반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저지른 죄는 숨기거나 없앨 수 없고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4.그래서 히브리서 9:27을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한다. 세상을 살면서 정리하지 못하고 간 죄는 죽어서도 따라오는 것이다.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특혜를 누리고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패역한 상태로 질주하였다. 결국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59절처럼, 행한 대로 받는 것이었다. 25.유다는 심지어 자녀들도 우상에게 바치면서 불사르는 것을 관행처럼 저질렀는데,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하여 “나의 자녀를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렇게 속 쓰리게 굴었던 패역한 유다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들의 약함을 보셨다. 26.안타깝지만 신앙적으로 우리가 강해지고 성숙해지지 않으면 그런 약함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만든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강해지는 것을 말하고, 강해지는 것은 상황과 주변의 흐름에 크게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30절을 읽어 보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방자한 음녀의 행위라,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지”……. 27.누군가가 약물이나 지나친 성적탐닉이나 이상한 것들에 집착하고 타락하는 것은 그 마음을 흔드는 것들에 대해서 적절하게 스스로를 방어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당연히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람들과의 관계도 중요하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악한 것에서 지킬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28.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신앙생활을 꽤 오래하고 직분도 있어서 잘하는 줄 알았던 사람들이 정말로 하찮은 일이나 말 때문에 스스로의 갑옷을 벗어 버리고 대적의 화살을 맨 살에 맞는다는 것이다. 훌륭한 성도는 무장이 잘 되어 있어서 날아오는 적들의 화살로부터 버틸 수 있는 성도이다. 사실, 사람이 훌륭한 인격자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과 경험이 필요하다. 29.하지만 괜찮은 사람이 무너지고 더러워지는 것은 단 5분 만에도 가능하다. 유다는 하나님의 특혜를 받고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이 받은 은혜를 지켜내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회개하지 못한 채, 자신이 저지른 죄값을 치르어야 했다. 지혜롭고 성실한 유다였다면, 하나님을 의식하고 미리 회개하고 마음을 정리했을 텐데, 결국 끝까지 가는 아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정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릴 정도였다. 30.그래서 오래 참으신 하나님이 결국은 정의를 구현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이 무너뜨린 약속을 다시 세우신다. 즉 너무나도 실망스럽고 화가 나는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이들이 무너뜨린 언약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내가 어떤 잘못을 했는데, 누군가가 나 대신에 변상하고 청소까지 해주고 욕도 대신 먹었다면, 할말이 없을 것이다. 31.왜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하냐면, 죄인에게도 여전히 과거의 약속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기 때문이다. 62절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라고 한다. /출애굽기 19:5-6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다.
32.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교만과 타락의 길을 가버렸다. 이거이 오늘날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런데 본장 6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가 행한 모든 일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신다. 당연히 유다는 놀라게 되고, 면목이 없어서 부끄러움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는 당사자가 놀랄만한 일인 것이다. 33./나는 오늘날 한국사람들이 분노를 품고 살다가 뭐하나 건수만 잡히면 늑대 떼가 먹이를 물어 뜯듯이 덤벼드는 현상을 본다. 정치도 원래의 뜻이 바른 다스림이지만,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전투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엔터테인먼트가 된 지 오래이다. 즉 우리는 서로에게 무자비한 세상을 본다. 그 가운데 죄만 더 늘어가며 자기 의만 주장한다. 34.그러나 그러한 죄악과 무지는 결국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일 것이다. 단체로 물어 뜯는 일이 죄가 아니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그렇게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며, 때로는 스스로의 나약함과 무능함에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바라보며 세워지는 것이다. /35.나를 악하게 만드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충동만 당하다 결국 회개도 못하고 그 값을 치러야 하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나의 궁극적인 소망이요, 내가 유일하게 의지해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 바짝 붙어 있는 지혜 있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한다.
36.바라옵기는 죄된 백성조차도 약속을 회복시키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가운데 오히려 그 사랑에 부합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