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4:9-21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는 자”
2024년 9월 8일 주일설교 (박성일 목사)
1.우리는 살면서 하나님에게 충성하거나 헌신하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욕심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만과 분노를 품는 사람들 볼 수 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공산주의의 토대를 쌓은 “칼 막스”(Karl Marx)이다. 그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의 위선과 거짓에 치를 떨게 되었고 이것이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막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다. 2.그런데 자기 자식들에게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 굶어 죽게 만들었으면서도 노동을 하지 않았던 그가, 누구보다도 노동자들의 선도자인척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막스의 인생이 자기 욕심대로 흘러갔다면 그렇게 악한 감정을 품고 사람 내면의 증오를 자극하는 전염병을 퍼뜨리지는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3.분명히 말하지만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손길을 누리고 싶으면 성도 또한 순간순간의 마음의 시험을 이겨내고 하나님께 다가가며 그 단단함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에 대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사람은 그것을 한 없이 그렇게 느낄 것이고, 이미 거리를 두고 자기의 입장만 변호하는 사람은 막스와 같은 심리적인 상태와 행동으로 빠질 수 있다.
4.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요한 1서의 시대는 교회를 흔드는 이단들의 공격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저자는 이렇게 교회에 어려움을 주는 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 대해서 어설프게 대하게 된다면, 예수가 중심이 되는 교회가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이단에 대해서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분별력이 인정이나 인간적인 외로움을 달래는 것보다도 상위에 있어야 한다. 5.이렇게 교회를 흔드는 이단의 공격에 대해서 자각을 가지게 한 저자는 이제 공동체 내에서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성도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단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단호하던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이제는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교회를 흔드는 이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하나님의 몸 된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는 사람들의 시기심과 증오에 불을 붙여서 수많은 사람들을 오랜 시간 동안 지옥에 빠뜨렸다. 6.일견 그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동의를 얻을 수 있었지만, 결국 증오가 바탕이 되는 사상은 그 결과가 좋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가지는 대부분의 시기와 정욕과 증오는 우리의 눈의 자극을 통하여 들어온다. 이러한 자극에 의해서 마음이 충동 당하게 되고, 이 충동이 삶의 이유가 되거나 영혼을 이끌고 가게 되는 사람은 정말로 의미 없거나 악한 일에 세월을 날려 버리기 쉽다. 7.그래서 요한1서2:16-17을 조용히 들을 필요가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8.이처럼, 우리 인생의 지침과 목표를 영원한 것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본문 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한다. /9.그리고 7-8절을 읽으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나셨는데 9절을 보니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즉 누구보다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10.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안에 있는 시기심과 불만에 기초한 꼬인 감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그릇에 맞는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에 부응하는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도 선을 흐르게 하며 사는 것이고, 죽음 이후에도 누구에게나 준비된 심판을 두려움 없이 기꺼이 맞이하는 진짜배기 성도가 되는 것이다. /11.더더군다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권한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는 것이다. 자격이 있고 너무나 훌륭해서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며 기대감을 가지시고 먼저 사랑해 주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잘못이 있다면 여기에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냥 말로만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12./만약에 어떤 사람이 욕심이 나서 누군가의 귀한 물건을 훔치려고 했는데, 상대방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반항을 해서 구타를 했다고 해보자. 나중에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냥 말로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은 것과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보상을 해야 한다. 13.그런데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당연히 사람들이 대가를 치러야 한데,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속죄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죄의 값은 지불되어야 하는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 값 마저도 대신 내어 주신 것이다.
호세아를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도망간 아내를 데려오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 여자는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이상한 곳에 매여 있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은과 보리를 주고 이 여자를 사오라고 하신다. 14.그런데 남편에게 커다란 배신감과 상처를 준 여인을 위해서 값을 지불해서 데려왔더라도,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여자를 위로해 주고 포도원도 주라고 한다. 아니 누가 누구를 위로한단 말인가? 심지어는 호세아 3:1절에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15.호세아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하는 책이다. 배신했고 방탕했고 실망을 끼친 존재이지만, 그런 여인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데려오시는 존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신의 방황 후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깨달은 사람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16.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씀이 마음의 저항이나 불편함 없이 들리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 아직도 불만과 신앙적이지 않은 의문과 불순종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교회의 리더로서 서서는 안된다. 교회의 리더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본문의 저자는 11절에 보니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17.그러면서 12절에 하는 말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한다. 성도가 그 안에 하나님이 내재하셔야 힘을 얻고 그 권위를 힘입을 수 있는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심령의 소유자가 누구냐 하면, 그 마음에 증오나 불만이나 상처가 가득한 사람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한 자라는 것이다. 18.향기가 날리는 꽃밭에는 꿀벌이 앉게 되고, 쓰레기 냄새가 나는 곳에는 파리가 꼬이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틈을 노리며 우리 안에 알을 까려는 파리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즐겨 찾으실 만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을 따라 살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태도가 우리의 영혼을 향기나게 하고, 이렇게 하나님과 빈번하고 단단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당연히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더 자신감 있게 된다. 19.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라”고 한다. /우리가 늘 동행하던 하나님을 심판자로서 대하게 될 때, 당연히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훨씬 더 담대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은 단지 그렇게 사는 것이 좋아 보이고 남들에게 인정받는 수준을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20.17절을 보면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리라”고 한다. 사람이 사랑 안에 거해야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이 없어야 신앙생활을 온전하고 건강하게 할 수 있다. /내가 뉴욕에 있었을 때 종종 여름 입양아 캠프를 도왔다. 한국의 여대생들도 지원하러 오고 근방의 80여명의 입양된 한인 아이들이 캠프에 참가하였다. 21.봉사자 중에는 이제 어른이 되어 버린 입양아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열정으로 피부색깔이 다른 한국의 입양아를 기른 부모님들을 존경한다. 내가 담임하던 교회에도 입양아 틴에이저가 있었는데 마약에 빠져서 아이들을 유혹하였다.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게다가 아이가 심약하게 생겨서 많은 아이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였다. 22.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호시설에 여러 번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정말 훌륭한 여자였다. 아이가 빗나가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려고 했다. 언젠가 이 어머니가 교회 앞에 차를 주차해 놓고 운전대에 고개를 파묻고 우는 것을 본적도 있다. 자기 친아들도 있는데 굳이 한국애를 데려다가 사서 고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23.아무튼 종종 입양아들을 보면 마음이 좋지 못했다. 어떤 여자아이는 어디서 구했는지 아주 작은 한복을 이상하게 입고 있었는데, 백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는 눈빛이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입양 캠프에서 본 대부분의 아이들의 눈에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평생 교제하다 죽게 되면 가는 곳이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이다. 자기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사람의 눈은 빛나고 자신감이 넘칠 것이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었던 사람, 그 심령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던 사람은 두려워하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다. 24.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심판의 시간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그 안에 풍성하게 채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감사와 찬양의 말을 입에 달고 살면, 그러한 고백이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들인다. 왜냐하면 내 영혼과 입술에서 꽃향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25.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충만해지는 사람은 동시에 마음 속의 두려움과 초조함이 밀려나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음 속의 두려움은 믿음을 갉아먹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말려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부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솔직히 아무리 부유하고 힘이 있다고 하여도 그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진시황”은 셀 수 없는 사람을 죽였다. 26.그래서 암살을 당할 뻔한 경험들도 있었다. 남들에게 원망을 많이 사다보니, 자기가 죽으면 저 세상에서 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자기를 지킬 군대를 만들어서 무덤에 같이 두었고, 할 수 있으면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를 찾도록 사람들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성경의 “에스더”를 보면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왕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27.심지어 왕비도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잦은 암살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는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심지어는 아버지도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에스더의 남편은 인도에서 애굽까지 차지한 무서운 정복자였는데, 한편으로는 밤잠을 설칠 정도의 심리적인 불안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람은 누구라도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 28.그리고 사람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은 그 영혼을 갉아 먹는다. 걱정이 많은 사람은 믿음이 이미 껍데기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코 담대함을 얻으려면 반복해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야 한다. 본문 18절을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한다. 29.즉 충만한 사랑이 우리 안의 두려움을 밀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에 대해서 잘못된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잘하는 것처럼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아들과 같이 운전을 하다가 신앙에 대한 질문을 들었는데, 자기 부대에 있는 사람이 와이프랑 죽도록 싸우기에 덕이 안되는데, 밤에 SNS에는 아주 은혜로운 성경구절을 올린다는 것이다. 30.나는 어쩌면 그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약점을 덮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 구절을 올리는 순간만큼은 일시적으로 진실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일시적인 진실함만으로는 신앙이 유지될 수 없다. 본문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한다. 31.이렇게 자기 눈 앞의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밤에 SNS에 성경구절 올리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자신 안에도 사랑과 평화가 없는데, 다른 사람보고 교회 가자고 하자면 당신이나 잘하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32.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부끄럽게 믿는 사람으로 보여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21절은 말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물론 자기 본성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그냥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33.삶의 중심과 기준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다 5:4을 보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한다. 34.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채우며 그 임재하심 가운데 변화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승리가 성도를 더 빛나게 하고 자랑스럽게 한다. 우리는 한번 사는 인생을 부끄럽게 끝내는 인생의 소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통하여 이기는 삶, 자랑스러운 믿음을 드러내는 멋진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35.바라옵기는 다른 더러운 것들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충만함을 얻는 성도가 되어서 심판을 담대함으로 맞이하고 두려움을 이겨내는, 빛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