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 1주
미가 5:1-15 “베들레헴에서 나오실 분”
(2024년 12월 1일 박성일 목사)
1.내가 웨슬리안(Wesleyan) 신학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할 때, 감리교인의 성숙은 죽을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강의를 듣고 “그렇다면 노인도 성숙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때 나는 겨우 31살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의지도 지력도 육체적인 능력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과연 영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2.여기에 대해서 교수님은 늙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설명을 해 주셨는데, 시간이 지나고 노년에 있는 사람을 관찰하면서, 사람이 나이가 들어도 그 안에 좋은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지향점을 잃어버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왜냐하면 실제로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 물으면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4%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나이가 꽤 있어도 노인으로 칭하는 것 자체를 몹시 못 마땅해 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4.그러니 육체적, 정신적 기능은 약해졌어도, 그 안에 어떠한 욕망이나 소망을 품는 힘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노년에 품는 욕심이 단지 세상적인 것이라면, 사람들은 그것을 “노욕”이라고 부르며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에 대해서 추하게 생각한다. 5.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왕 욕심을 가질 것 이라면 신앙적이고 소망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욕심을 품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열망을 가진 것은 이제 자신의 인생도 의미 있게 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마음을 얻게 한다. 그러니 추한 노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롤모델”(Role Model)로서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6. 더더군다나 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더 마음이 커지고 남을 더 용서 잘하고 이해심이 많아지는 것이 절대 아님을 보면서, 오히려 끝까지 신앙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상이 있어야 기존에 하던 것들이라도 지킬 수 있음을 보게 되었다. 즉 이제는 나이가 들었으니 새로운 어떤 것을 하기가 귀찮고, 성경도 보기 귀찮고, 다 싫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과거에 열심히 했던 것도 다 날려 버리는 일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7./어떤 여자 권사님(Exhorter)가 중년의 나이에 열심히 교회에서 섬겼다. 일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교회의 일꾼이었다. 그런데 노년이 되어서 자기 마음을 관리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다니기 싫어지고, 임종에 다다라서는 믿음마저 다 사라져 버렸다. 8.그래도 목사님이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는데, 이제 자기는 천국도 안 믿어지고 죽으면 끝인데, 죽는 것도 안 받아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육체적인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에게 간 사람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엘리야”이고 다른 하나는 “에녹”이다. 9.그런데 에녹은 어떤 대단한 일을 한 사람, 대단한 업적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다. 창세기 6:24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한다. 우리는 자신의 수명이 다하는 시간까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고, 끝까지 하나님과 교통하는 정신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10.왜냐하면 구원의 문제 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자손들의 기억 속에 남기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이, 또는 죽음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이 겁 많고 나약하거나, 혹은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자손들을 비난하거나 화를 내다가 간다면 그 이미지만 머리에 남는 것이다.
11.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울 수 있기 때문에 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렇게 용기를 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어야 하는데, 자기 마음이 평안하고 단단한 사람이 더 용기를 내기 마련이다. 12.불안함과 걱정에 잡힌 사람이 용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 용기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평강의 근원은 예수님이시다. “대강절”(Advent)를 맞아, 우리의 인생을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마지막도 그리고 영원까지 아름답게 하고 소망 있게 하실 예수님을 마음속에 평강스럽게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기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13.오늘 본 장을 관통하는 중요한 관점은 “순종”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순종은 옵션이 아니다. 더 잘하면 좋은 것이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것이다. 순종은 절박한 것이다. 그리고 순종이라는 것은 마음과 생활 속에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나타난다. 14.사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신앙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충돌하는 일들을 경험한다. 그 안에서 갈등하지만 솔직히 우리 안에 심겨진 양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들을 알고 있다. 그냥 애써 외면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마음의 주도권을 잡지 않으면 이제 나의 약한 틈을 파고 들어서 새로운 우상이 들어온다. //“15.미가” 선지자는 타락한 북이스라엘과 유다 양쪽을 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둘 다 우상숭배가 나라를 망쳤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성숙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꾸준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훈련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16.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잘 지키고 믿음안에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거룩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그 영혼이 아름답기를 바라시며 그러한 자에게 구원의 특권을 허락하사 영생을 주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그냥 자기 본성대로 살아도 된다. 30여년전 한국에서 목회자 수보다 무당 숫자가 열배는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교회는 약해져도 무당은 여전히 성행한다. 17.사람들은 당장 자기 필요한 욕망만 채우기 원할 뿐이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따르고 싶지 않다. 본서에 나오는 우상숭배도 사람의 본능에 기분 좋게 맞추어 주는 것이었다. 내가 굳이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우상이 판치던 당시에는 당장 세상을 살면서 비록 남의 것을 빼앗고 악한 짓을 해도 윤리적인 통제를 받지 않았다. 18.아니 오히려 더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을 종용한다. 우상의 산당에는 몸을 파는 여자들과 남자들이 있어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쾌락을 즐겼다. 이것을 자신들의 종교적인 행위로 보았던 것이다. //잘 하던 성도도 이간질을 당하거나 약해지면 우상이 그 마음으로 파고 들어온다.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징계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19.본문 15절은 보면 하나님은 “내가 또 진노와 분노로 순종하지 아니한 나라에 갚으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포커스가 “분노”와 “징계”가 아니라 “순종하지 아니한 것”에 맞추어서, 반대로 순종을 지향하는 중심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의 가장 큰 본은 예수님이 나타내셨다.
20.본문의 2절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것으로 많이 인용되어진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것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개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의 옛 지명으로 다른 베들레헴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기입되었다. 21.그런데 이 예언이 어떤 배경 가운데 있는지를 살펴보면 1절에 보니 적들이 이스라엘을 에워싸고 재판자의 뺨을 친다. 여기서 재판자는 왕의 재판장으로서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왕이 수치를 당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메시야가 나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잡혀 있게 된다. 이것은 이후에 로마에 의해서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을 생각나게 한다. 22.그리고 여기에 부응한 메시야는 4절을 보니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한다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이름으로 목양을 하시는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진다. 그리고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친다고 하니, 이것은 주님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23.그리고 예수님은 평강이 된다고 하신다(5). 당연히 평강은 전시와 위기에 그 값이 더 발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앗수르” 사람으로 표현된 적들의 공격이 있어서 그의 백성들이 그 땅에서 밟힐 때, 메시야인 예수님이 그들은 구해주신다는 것이다. 이처럼 평강의 메시야인 예수님은 그냥 편하게 계시거나 듣기에만 좋은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그의 고통받는 백성들을 전쟁의 위협 속에서 건져 내 주신다는 것이다. /24.조선 시대의 양반은 어떻게해서든 병역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심지어는 병역 대신에 지불하는 세금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였다. 그래서 우리가 알듯이 불과 30년전만 하더라도 돈을 주고 병역에 대해서 비리를 저지르는 일들이 뉴스에 항상 등장했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앞에 나가 싸우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그래서 귀족들끼리는 서로 저격도 하지 않도록 하였다. 25.저격은 용감한 상대에 대한 비겁한 행동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왕위가 유지되는 나라들이 상당 수 있다.
메시야는 구경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로 들어오셔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렇게 낮아지신 메시야와 동행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7절을 보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니 아니할 것이며”라고 한다. 26.즉, 이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니,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와 힘으로 그 대적들을 멸하는 승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 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27.그런데 현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것을 본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삽니다”라는 말을 들어도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의 영향에 따라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주님이 마음에 평강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애초에 주님에게 자기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사람이다. 28.아기 예수를 마구간에나 눕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가장 좋은 장소를 내어 놓는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내 중심에 계셔야, 평강도 힘있게 나의 삶을 이끌고 가는 것이다. 본문 10절에서 끝까지 보면, 하나님은 악한 자의 자리를 무너뜨리며 점쟁이를 없애시며 우상을 멸절하시는 것을 알려 주신다. 29.자기 마음에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것보다 더 큰 대상이 있다면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성숙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마음에 있는 우상은 헛된 것이며, 자기의 상한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자기의 더럽고 악한 본성에 장단을 맞추어 주며, 어느새 우리를 더욱더 수렁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다. 30.결국 이것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데, 자기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이러한 우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31.놀랍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쫓는 자들도 자신의 악함을 말로는 다 정당화 할 수 있지만, 미가 6:14-15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서 평강을 빼앗으신다,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32./그런데 이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은 의식했기 때문에, 마음은 우상에게 가 있으면서 하나님께 하는 척은 했다. 쉽게 표현해서 외도를 하는 남편이 아내에게 가방을 사주면서 자기는 할 바를 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가볍게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라 최고의 것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고 우리의 진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다. 33.우리가 지혜로운 성도라면 진정코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을 알고 그것을 행해야 하는데 6:8을 보면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mercy)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께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옆에 바짝 붙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34.이것을 실행하지 못하면서 다른 것들을 내세우다는 것은 의미 없다. 하나님은 타락한 시대, 우상에 빠져서 온갖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셨다. /미가2:1에 보면 사람들은 자려고 침상에 누워서 날이 밝으면 행할 악한 일에 대해서 계획한다. 다음 절에는 이들이 남의 밭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고, 이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산업을 강탈한다고 한다. 35.1:7에 보면 하나님이 부수시는 우상들은 음행의 값인데 기생들의 값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미가는 1:8에 너무나 속이 상해서 애통하며, 벌거벗은 몸으로 들개와 타조같이 애통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데, 여전히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민족을 보면서 괴로웠던 것이다. 36.그러나 그 또한 마음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미가의 마지막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7:19을 보면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나아지는 과정을 보니 3:8에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고 한다. 37./베들레헴에서 나오신 분은 그의 백성에게 용기와 능력과 정의가 되셨다.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기 의를 주장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정의는 예수님이시다.
그러한 예수님은 공생애를 마치시고 떠나시면서도 성령을 대신 보내시어 우리가 여전히 능력과 용기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도우셨다. /베들레헴, 즉 인간의 실제적인 추하고 악하고 부족한 삶속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심령에 들어가시기를 기다리시며 문을 두드리신다. 38.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신 예수님에게 우리 또한 문을 열고 맞아 들이는 능력 있고 용기 있는 사람, 즉 평강을 누릴만한 사람으로 서야 할 것이다.
바라옵기는 인생 속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평강으로 맞이하는 준비된 심령의 사람이 되어서, 영생을 누리는 것에 부끄러움 없이 나가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