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인도하시는 교회"(시편23)
 
작성일 : 24-12-31 13:22
2024 송년 주일 12.29 스가랴 9:9-16 “겸손의 왕”(박성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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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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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9 스가랴 9.9-16 겸손의 왕.docx (26.4K) [39] DATE : 2024-12-31 13:22:34

2024 송년 주일 12.29

스가랴 9:9-16 “겸손의 왕”(박성일 목사)

        1.스가랴는 바벨론 포로를 마치고 돌아온 유다인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 책이다. 바벨론이 세상을 흔들 때,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다 주변의 나라들도 망하게 되었는데, 유다는 70년이 지나서 이미 왕조도 페르시아로 바뀐 상태에서 본토로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다니엘도 유다의 귀환을 알았기 때문에,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하게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였다. 2.즉 무너진 나라이지만 그곳을 다시 세우실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신뢰하였고, 이러한 신뢰는 사자 굴에 던져지는 극도의 시험마저도 통과하게 하였다. 사람이 강건하게 살려고 한다면 그 안에 강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냥 자기 경험과 자기 주장만을 내세운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집”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은 결국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3.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고집에 있어서는 유연하고, 신앙의 본질에 있어서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반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나를 단단하게 하는 것은 자기 의나 자기 삶의 짧은 경험에서 얻어진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 해야겠다는 굳은 의지속에 형성되어진다. 4.이사야 26”3을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같이 신앙의 지조가 없는 자가 아니라 그 심지가 견고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지만, 무너진 장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실제로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래서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5.학개 선지자는 스가랴와 같은 시대에 있었던 선지자로서, 사람들이 과감하게 하나님의 집을 다시 지을 엄두를 내지 못하자 이들을 독려한다. 스가랴도 커다란 공사에 접하고 있는 유다 백성을 독려한다. 당시에 정치적 지도자는 “스룹바벨”이었고, 종교적 지도자는 “여호수아” 대 제사장이었다. 스가랴 3장에 하나님은 여호수아 대제사장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4장을 보면 순금 등잔대가 있는데, 성막에 있는 것과 같은 형상으로 보인다. 6.당연히 이것의 역할을 불을 밝히는 것인데, 그런데 불을 밝히려면 당연히 연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시에는 올리브 기름으로 불을 밝혔는데, 이 기구의 뒤에는 두 그루의 감람나무(Olive Tree)가 있다. 이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상징한다. 즉 돌아온 유다에게 빛이 비추도록 하는 것에는 이들의 공급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선한 기름을 흐르게 해서 공동체가 어둠을 벗어나 빛가운데 기쁨을 얻게 한다. 7./광야 시절에 우리가 아는 것처럼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이들을 이끌며 함께 했다. 당연히 햇볕이 강렬한 낮에는 구름이 그늘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밤에 자리를 지키는 불기둥은 난방뿐만 아니라 조명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 불기둥은 성막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성막을 주위로 천막을 치고 살았다. 8.이것은 생활의 중심은 교회이고 그 위에 있는 성령의 불길이 성도들을 따듯하게 하고 어두움에 빛을 비추어 준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빛을 비추는데 도움이 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같이 빛을 비추는 연료를 공급하는 성도 말이다. 안타깝지만 어떤 사람은 불이 치솟아 오르려고 하는데다 찬물을 끼얹기도 한다. 9.어떤 사람은 쓰레기만 남가지고 가서 그것을 뒤처리하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이 지나간 자리에 과연 주님을 위해 빛을 비추도록 도운 사람인지, 아니면 주님의 빛을 가린 사람인지가 남게 될 것이다.

사실 당시에 성전을 지으면서 육체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어렵기 때문에 자신들이 과연 그것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10.그래서 이들은 성전은 미뤄두고 일단 자기 집을 잘 꾸미는 일에 신경을 쓴다. 학개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1:4). /사실 이들이 기적적으로 어느 날 포로의 신세에서 해방되었고 심지어는 페르시아에서 상당한 물질적 지원을 받아서 본토로 돌아오게 되었다. 11.그러나 본토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과거의 죄로 인하여 황폐하게 된 폐허였다. 당연히 이걸 어떻게 해 하는 생각이 들만하였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그런데 스가랴 4:6을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12.그렇다. 이들이 애초에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것도 이들의 노력이나 수고나 열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해 주신 것이다. 과거에 가나안 전쟁을 할 때에도 그들이 이기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다.  인간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경험으로는 되지 않는 것을 성령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 하게 된다. 13.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아끼시고 세우시면서도 그들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은 단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시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하게 만드신 성령님, 그리고 영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4.사람은 좋은 일이 이루어지면 서로 그 영광을 자기가 한 일이라고 차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진정코 주님의 사랑하시는 눈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안다. 지혜로운 사람은 놀라운 일의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지 않는다. //오늘 본장을 보면 유다 주변 나라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5.특히 3절의 “두로”를 보면 자기를 위하여 요새를 건축하며 은을 띠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다고 한다. 그런데 4절을 보니 주께서 그를 정복하시고 그의 권세를 바다에 처넣으시리니 그가 불에 삼켜질지라고 한다. 이 내용을 이해하려면 에스겔 26-28장을 알아야 하는데, 두로는 유다가 멸망할 때 이것을 기뻐하였다. 무역의 경쟁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16.물질도 풍부해지니 두로의 왕은 교만해진다. 두로는 바다를 끼고서 해상무역을 했는데, 두로 왕의 교만한 상태에 대해서 지적하는 내용이 28:2에 있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17.이렇게 교만한 언행을 하던 두로에 대해서 본문은 징계가 임함을 예고한 것이다. “블레셋”은 알다시피 이스라엘 지역의 해안가를 끼고 있으며, 물고기와 사람이 섞인 모양의 신을 섬겼다. 그들은 발달한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계속 이스라엘 옆구리의 가시였다. 블레셋에 대해서도 6절에 그들의 교만을 끊을 것이라고 하신다. 18.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교만을 큰 죄악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우리는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당신은 교만한 사람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누가 자기가 교만하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자기가 주권을 가지고 주장하며 심지어  자기가 신이라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보았다.

19.창세기 3:5을 보면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한다. 피조물인 하와가 이 말을 듣고서는 그 열매를 따먹는다. 그리고 자기 혼자 그치지 않고 남편에게도 먹게 한다. 물론 그 열매가 생긴 것도 예쁘고 맛있어 보였지만 사탄의 말을 잘 생각해보면, 하와가 그것을 먹고 하나님 같이 심판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심판의 주는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멀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에 대해서 자극적인 기사 몇 줄에 근거해서 심판하고 정죄하고 마치 자신이 대단한 정의의 사람인 것처럼 신이 난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지만 사실은 남들을 깎아내리고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는 것은 커다란 유흥인 것이다. 21.당연히 이러한 성향은 가까이에 있는 주변 사람들 또한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을 내려버린다. 자꾸 주변 사람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심판의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4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22.그리고  이어서 이런 사람을 위선자라고 하신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신나게 험담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 정작 자기 얘기가 조금이라도 돌면 참지 못하고 폭발하거나 우는 것을 보았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우리가 왜 자꾸 심판의 말을 하냐하면 남을 깎아 내릴수록 자기는 그렇지 않은 더 훌륭한 사람이라는 착각이 들게 되고, 이렇게 스스로를 인정해주니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23.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누군가가 바람을 피웠다고 사방 팔방 나팔을 불고 다니는 사람도, 실상 자기도 같은 유혹과 욕망을 가지고 살고 있기 쉽다. 자꾸 자기를 정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포장하고 혹은 자신을 더 크게 보이려고 부풀려 말하는 것은 그 안에 무시당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으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24.본문은 유다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처리를 말하다 갑자기 유다의 시온으로 관점이 옮겨지며 시온의 딸이 크게 기뻐하라고 한다. 예루살렘의 딸도 기뻐하라고 하며 이들의 왕이 네게 임하신다고 한다. 이 왕이 나타나므로 대적들이 물리쳐지고 구원과 영광이 임하는 내용들이 따라온다. 16절에 보면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고 한다.   

       25.이렇게 오시는 왕은 전쟁을 끊고 화평을 전하는 분이시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라고 하며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에서 땅끝까지 이른다고 한다.  이런 흐름 속에 11-12절에 보면 갇힌 자들은 꺼내지며, 갇혀 있음에도 소망을 품은 자들은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고 그들의 억울함은 해결되어진다. 26.이 왕은 9절에보니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시다고 한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겸손의 본이 되신다. 우리 주님은 멀리 서서 우리 보고만 적진으로 향해 달려가라고 하시는 대장이 아니라 가장 앞에 서서 구원의 깃발을 들고 적진을 향해 나아가시는 대장이시다. /27.나는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신성로마 제국과 바티칸 교황청 사람들 앞에서 심문을 받던 자리에 서 보았다. 그 자리에 커다란 신 한켤레를 조각하여서 누구라도 그 위에 서게 하였다. 여기에서 루터는 “하나님 제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28.그래서 루터가 만든 노래인 “내 주는 강한 성이요” 2절의 가사를 보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라고 하며 그 어렵고 두려운 종교개혁을 감당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외부의 어떤 세력과 싸우기 이전에 먼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29.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자기를 포장하기 애쓰고, 때로는 혈기나 정욕대로 함부로 더러운 말이나 행동을 하거나 혹은 신앙적이지 않은 것이 지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한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를 의지하면서 예수님이 보이신 겸손의 태도를 본받는 것이 바로 예수 제대로 믿는 것이다.

9절 하반부를 보면 예수님이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한다. 30.우리는 예수님이 그 사역의 정점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호산나”(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자기 옷을 바닥에 깔았고 종려나무를 흔들어 댔다. 그런데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은 커다란 말이나 화려한 마차를 타고 영광스럽게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남의 나귀를 얻어서 인간적으로 보면 상당히 초라한 입장을 하신다. 31.고대에 로마는 개선하는 장군을 위하여 개선문을 만들어 주었고, 이 문의 크기는 그가 가져오는 금의 양과 정비례하였다. 심지어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외국에서 금메달을 따고 오는 사람을 짚(Jeep)차에 태워서 꽃가루를 날리며 화려한 환영식을 해주었다. 32.그러나 인간의 죄, 즉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늘의 높은 보좌를 저버리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은 태어난 곳도 아무도 원치 않는 냄새나는 마구간이었고, 영광의 정점에서는 겨우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고, 결국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를 끌고 가셔서 못박히시는 죄인, 즉 가장 낮은 자의 자리까지 이르셨다. 33.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은 신앙공동체에서 마음이 흩어지고 분리되는 모습을 보았고 실상 그 안에는 다툼과 허영이 있음을 보았다. 34.그래서 2:2-3을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라고 하고, 그리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면서 예수님이 보이신 본에 대해서 말하는데 5-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체이시고 동등하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 곧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한다. 35.즉 겸손은 교만을 멀리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을 우리의 왕이 직접 본을 보이셨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보이시고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5:5을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한다. 36.신앙의 겸손도 훈련이 된 사람이 얻을 수 있다. 자꾸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심판의 소리, 남을 비판하는 소리, 그러면서 자신의 과오를 포장하는 소리를 이겨내고 예수님이 보이신 본을 따라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은혜를 주시기 원하시는 성도로 서게 되는 것이다. /37.장로교 목사님 중에 존경 받는 이자익 목사님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떠돌다가 전북 금산에서 조동익 장로님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하였다. 그러다 지역에 교회가 생기고 이곳에서 둘 다 열심으로 섬겼고 장로투표가 있었는데, 둘다 후보가 되었고, 같은 집 머슴인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 38.당시가 1907년이니 신분에 대한 의식이 강한 시대에 아주 불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기보다 9살이나 어린 이자익을 세워준 사람은 조동익이었다. 이후에 조동익은 장로가 되었고 이자익을 신학교에 보내고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리고 자기집 머슴이던 이자익 목사가 담임목사가 되어 금산교회에 부임하였다. 39.그런데 또 그렇게 열심히 담임목사를 보필하며 같이 어렵고 힘든 시기를 도왔다고 한다. 독립운동과 여러가지 선한 사업에도 힘을 쏟은 이들은 신앙인들의 귀한 모범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들의 자녀를 축복하셨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태도이며,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다. 40.오늘 우리의 대장이신 앞장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를 축복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러한 결심위에 서서 함께 지키시기를 기도한다.

바라옵기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겸손의 왕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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