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22 성탄절
요한1서 3:1-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박성일 목사)
1.우리는 죽을 때까지 신앙안에서 성숙함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람을 벗어나서 거듭나야 한다. 왜냐하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못된 기질, 못난 변명, 시기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습성을 벗어나야 거룩한 자가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2.물론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나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되돌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도우실 분을 보내셨다. 본문 1절을 읽어보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컫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3.예수님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로 인한 것이 아니었고, 우리가 너무나 수준이 높고 대우를 받을만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라서도 아니다. 오로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항 은혜였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미숙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불과 18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청년들도 보았다. 4.그런데 사람이 성숙하게 되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냐 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사랑과 호의를 감사히 받을 줄 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자기를 위한 수고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도, 감사의 표현도 없다. 이런 사람은 나이가 들었어도 어른 대접받을 생각하면 안된다. 어른으로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더 큰 아량과 성숙함과 단단함을 보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5.그러므로 오늘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다면, 감사한 대상에게 감사를 표하고, 나 또한 부응하여 선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목적과 의도를 알고, 그 뜻에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6.그런데 이것이 맞다고 생각해도, 이러한 노력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마귀” 라고 한다. 즉, 우리가 주님께 화합하여 선하게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이것을 극복한 사람이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향해서 소망을 가진 자는 과거보다 오늘 더 깨끗해지고 과거보다 더 가까이 주님 곁에 다가가야 한다. 7.그래서 본문 3절을 보면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한다. 본서를 작성한 “요한”은 교회내에서 성도들이 과거의 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미워하고 다투는 것을 보았다. 이제 예수 믿은 연륜이 짧은 성도들이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8.그럼에도 그것으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교회를 흔드는 대적만 신나게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좋은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서도 변화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실체적인 신앙인격으로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귀만 즐거운 말씀듣기는 우리의 수준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9.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성숙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못된 기질들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어렵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꾸준하게 기도부터 시작해야 한다. 특히 나는 오랜 세월 교회를 관찰하면서 성도들이 넘어서야 하는 못된 기질은 “시기(Jealousy)”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10.아니 발견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많이 붙여서 자신의 논리가 정당화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밑바닥의 심리는 시기심이 가득한 것이었다. 누구나 자기 주장에 대한 논리는 있기 마련이지만, 조용한 시간에 하나님께 양심의 불을 켜서 스스로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서, 만약에 그 심리가 시기심에 기인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면 이것에서 돌이켜야 한다. 11.시기는 살인까지 할 수 있는 광기이고, 많은 공동체를 무너뜨린 주범이다. 심지어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도 이 시기심이라는 폭풍 앞에서 목숨을 잃으셨다. 우리가 진정코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 안에 거하기 원한다면, 죄에서 멀리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으심을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를 담고 있는 인간의 연약함이 주님의 공로를 자꾸 개인적으로 무너지게 한다. 12.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죄는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겉에서 보면 하나도 죄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 곁에 가까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님을 우리의 심령 속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 13.그래야 우리가 과거의 죄 된 존재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4-5절을 읽어 보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반기며 즐거워하는 이 절기에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스스로를 낮추사 인간세상에 오신 것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심 이었다는 것이다.14.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묻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겠다고 두고두고 맹세하고 항상 다짐해도, 죄의식과 두려움 때문에 자다가 일어나서 자기가 저지른 일들을 고백한다. 물론 나중에는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15.죄의 문제는 덮어두고 그냥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짓는 일상의 많은 죄들이 바로 시기심에서 촉발된다. 성숙한 성도는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할만한 마음의 역량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어떻게해서든 남의 흠짐만 잡고자 하는 태도가 일상화되어 있다면, 이것은 주님이 주신 모습이 아니다. 16.“스가랴”를 보면 메시야에 대한 여러가지 징표의 말씀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9:9의 말씀으로 메시야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한다. 3장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 앞에 세워진 돌이 있고 여기에 일곱 눈이 있는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고 한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속죄한 예수님을 나타낸다. 그런데 같은 장을 1절부터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서 있고, 하나님 옆에는 사탄이 그 오른편에 서서 여호수아를 정죄한다. 우리가 “욥”기에서 보면 알듯이 사탄은 우리를 정죄하는 자이다. 17.어떻게해서든 우리의 틈을 잡고 비난하여 끌어내리려고 하는 존재이다.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수고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적인 면을 맡고 있던 “스룹바벨”을 중요하게 본다. 다 망한 나라, 무너진 나라에 와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성전을 세우려는 지도자들이 마귀가 보기에 엄청나게 눈에 거스르는 존재로 보이지 않았겠는가? 18.나는 살면서 상대편에 대한 시기심으로 인해서 자기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을 깎아 내리는 것을 어려 번 보았다. 물론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진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문제도 아닌 것을 문제로 만들어서 공격의 방법으로 삼는 것이 만연하다.
19.사탄이 여호수아를 대적하자 하나님은 사탄을 책망한다고 하신다. 여호수아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하신다. 즉 불에 탈 정도로 죽을 고생을 하다가 건져진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명령하여 그 더러운 옷을 벗기게 하시고 이어서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3:4)고 하신다. 20.말했듯이, 세상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라도 부족한 점은 있다.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그런 약점을 파고들어 하나님의 사람을 무너지게 하려는 자이고, 하나님은 더러움을 제거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며 죄악을 제하여 주시는 은혜의 주권자이시다. 21.이것을 본 스가랴는 여호수아에게 “정결한 관(모자)을 머리에 씌우소서”라고 한다. 그래서 여호수아 제사장은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쓰고 깨끗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천사 옆에 서게 된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그의 동료들을 향하여 메시야의 오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3:8). /예수님을 그냥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내 안에 모시는 분이 될 때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된다. 22.나는 원래 교회에서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몰래 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그 마음에 성령이 임하면서 더 이상 그것이 재미가 없어져서 끊어버린 이야기들을 들었다. 성도가 자신의 삶을 후회와 욕망만 점철되어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소망 있고 구원 가운데 서게 하려면, 예수님을 우리 안에 기꺼이 영접하며 겨우 마구간 같은 냄새 나고 더러운 곳이 아니라 마음의 가장 좋은 중심을 드려야 한다.
23.예수님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은 너무나도 감사하고 기쁜 일인데, 그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환영하는 수준이 아니라 내 마음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진정코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구원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 새롭게 태어남으로 과거의 더러운 기질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수준으로 성장하는 제대로 된 신앙인, 아니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이다. 24.죄 된 속성에 여전히 충동 당하며 하지 말아야 할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소속을 당당하게 말하기 어렵다. 자기가 완전히 주님과 동행해야 우리의 대적이 우리를 미혹하거나 충동하지 못한다. 25.애초에 대적이 우리를 충동하거나 공격하는 것은 그 안에 스스로를 지킬 성령이 비었기 때문이다. 본문 7절을 보면 스스로가 미혹 당하지 않게 할 것을 당부하고, 8절을 보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한다. 누구도 자신은 마귀에게 속한다고 하거나 속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6.그런데 자신의 혈기나 시기나 정욕때문에 죄 된 말을 하고 죄 된 행동을 하면, 마귀는 그 사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기회를 잡게 된다. 그래서 에베소서 4:26-27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한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폭풍이 치는 순간에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다. 27.그리고 주님은 없고 마귀가 들어온 사람은 이제 주님의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사람이 된다. 누가복음 22:3을 보면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한다. 한 때는 예수님을 따라서 뜨거운 마음으로 열정을 살랐던 유다에게 불만과 실망이 생기니 그 틈으로 사탄이 들어간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신앙생활을 끝까지 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사탄에게 틈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28.자신의 약점을 아는 것은 너무도 쉽다.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발끈하는 것이 나의 약점이다. 설교시간에 남들은 다 은혜 받을 때에도 나만 마음에 불편한 단어나 문장에 나의 약점이 담겨 있다. 적국이 상대국을 공격할 때, 당연히 적의 지휘관을 제거하거나 거짓소문으로 힘을 빼기도 하고, 상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노려서 공격한다. 29.우리가 마귀와의 싸움을 영적전쟁이라고 하는데, 당연히 마귀는 신앙적인 지도자를 흠집 내거나 신뢰를 떨어뜨리게 하고, 각 성도의 가장 약한 부분으로 파고 들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의 수치스러움이 부족함을 넘어설만한 자신감과 믿음을 얻게 될 때 더 이상 충동 당할만한 약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30.여기에 대해서 본문 마지막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8)고 한다. 마귀는 우리를 과거의 수치(shame)와 불안함 속에 묶어 두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함은 사람을 더욱더 시기하는 마음에 집착하게 만든다.
31.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이러한 과거의 습성과 세력에서 자유함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밝히는 누가복음 4:18-19을 보니 “이사야”를 인용하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고 이 글이 말씀을 듣던 자들의 귀에 응하였다고 한다. 32./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도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과거를 벗어나는 힘을 얻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도들의 존경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잘 늙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인생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9세기 런던에 “모트(E. Mote)”라는 37세 된 목공이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고용주를 위해서 캐비넛을 만드는 것이었다. 33.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였고, 자기 안에 있는 열등감과 자기보다 좋은 일을 가진 사람에 대한 시기심이 마음을 흔들었다. 삶에 대한 원망과 반항,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마음을 흔들었다. 34.그러나 우연하게 런던의 거리를 배화하다가 조그마한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존 하얏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그가 들은 메시지는 요한복음 3장에 있는 “거듭남”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이 날 자신이 거듭나야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 이후로 투덜거리며 하던 일은 그의 찬양속에 이루어졌다. 35.망치는 춤을 추었고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마음 속에는 생수가 솟았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그는 거듭났다고 찬양했다. 그러자 그의 일도 잘되어 자신이 사업주가 되었고 사업도 번창하였고, 그는 교회건축에 자신의 전재산을 드렸고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놀라운 도구가 되었다. 36.그가 주님께 감사하여 지은 시는 찬송이 되어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있다. 그가 지은 찬송가 488장 1절의 가사를 읽겠다. 37“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38.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망치려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거듭남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내려오신 예수님이 며칠 기뻐하고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찬송이 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천국을 맛보는 지혜롭고 깨이고 사랑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한다.
바라옵기는 우리에게 내려오신 예수님의 목적과 의도를 잘 이해하고 이것에 부합하는 인생을 사는 지혜롭고 축복받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